A 집사님이 청양고추를 두 자루나 챙겨 왔다. 그것도 우리가 평소에 봤던 새끼손가락만 한 크기가 아니었다. 일반 청양고추보다 서너 배나 크고 토실토실한 고추였다. A 집사님네 조카가 텃밭을 가꾸는데 농사짓기는 좋아하고 수확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단다. 그래서 A 집사님이 서리가 내리기 전에 고추를 양껏 땄단다.
헉, 이를 어쩐다?
나는 단 한 번도 청양고추를 먹어본 적이 없다. 반찬 속에 있는 청양고추 마저 살살 골라내고 먹는다. 나는 그 정도라 치고 남편은 아예 매운 것은 칠색팔색한다. 남편은 '고추'라는 말만 들어도 땀이 나는 사람이다. 색깔이 빨간 음식을 보기만 해도 얼굴이 붉어진다. 그래서 우린 청양고추가 필요 없다. 지금껏 청양고추를 사본 적이 없다. 먹어본 적도 없다.
저렇게 많은 청양고추를 어떡하지?
고민이 됐다. 일단 조금씩 소분했다. 어떤 이들은 청양고추가 아니면 아예 고추로 여기지 않는 분도 있지 않은가? 그런 분들은 좋아할 것 같았다.
예배를 마친 후에 원하는 분은 고추 한 봉지씩을 들고 가라고 했다. 식사 후에 카페에서 화기애애하게 한 주간의 삶을 나누던 중이었다. 그날의 주제는 청양고추였다.
"그걸 송송 다져서 설탕으로 재워 청으로 만들면 참 좋아요. 반찬 할 때마다 조금씩 넣으면 돼요. 그걸 넣으면 음식 맛이 깔끔해져요." 살림의 달인, K 집사님이 말했다.
그런가?
나는 귀를 쫑긋했다.
"청양 고추를 다지는 게 쉬운 게 아니에요. 그래서 '야채 다지기'나 '커터기'를 이용하면 좋아요.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O 집사님이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아하, 그렇구나. 그렇게 하면 칼로 다지는 것보다는 쉽겠네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조금씩 청양고추에 관심이 생겼다.
"백종원 만능 장아찌 간장을 사서 삭혀 두면 일 년 내내 먹을 수 있어요."
"그렇게 하려면 포크로 고추에 구멍을 내줘야 간이 고추 속까지 배어 들어요."
"나는 고추 끄트머리를 가위로 살짝 잘라주는데?"
"아예 서너 번씩 칼로 잘라서 해도 돼요."
"그러면 장기보관하기는 좀 그래요."
의견이 분분했다.
그날 대화는 온통 청양고추 조리법이었다.
나도 청양 고추를 한 봉지 정도 챙겨가기로 맘을 고쳐먹었다.
"에이, 청양고추'하면 '멸치쌈장'이죠."
"고추를 찐 후에 다져서 간장에 버무려 밥을 비벼 먹으면 그게 바로 밥도둑이에요."
하여간 그동안 몰랐던 청양고추 활용도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청양고추를 좋아하는 P 집사님께는 직접 배달해 드렸다. 그러자 P 집사님은 시누이가 가져온 것이라며 꽃게 무침과 전라도식 포기김치를 챙겨 주셨다.
한편, 절친 동료교사에게도 청양고추를 좋아하는지 물어봤다.
나: 선생님, 혹시 청양고추 드실 줄 아시나요? 엄청 많이 생겼는데, 우린 매운 걸 못 먹어서ㅠㅠ
동료: 우린 청양고추만 먹어요^^
청양고추를 들고 집으로 돌아와 도깨비방망이로 다져 청을 만들었다. 고추를 만질 때는 KF 94 마스크를 끼고 셰프 장갑을 꼈다. 그래서 기침도 안 나오고 손이 화끈거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온 집안은 매운 내가 진동했다. 거실에 있던 남편이 눈물을 흘리며 재채기를 해대기 시작했다.
다음은 갓 만들어 둔 고추청을 덜어 넣은 후에 된장, 고추장, 멸치를 넣고 쌈장을 만들었다. '만개의 레시피'를 펼쳐 놓고 그대로 따라 했다. 레시피에는 양파나 버섯을 넣고 하라곤 했지만 그렇게 만들면 장기보관이 안된다고 들었다.
쌈장 만드는 법 멸치쌈장으로 더 맛있게! - https://m.10000recipe.com/recipe/6873924
고추 청을 다 만든 후에 커피 스푼으로 살짝 찍어 맛을 보니 톡 쏘는 맛이었다. 혀끝이 알싸했다. 남편에게도 맛 보였다.
"어휴, 어휴ㅠㅠ"
남편은 깨알 반쪽보다 작은 분량을 맛봤는데도 금방 얼굴이 빨개졌다.
난생처음 만들어본 청양고추 멸치 쌈장은 레시피대로 완성했다. 직접 만들어 보니 몇 가지 팁을 알게 됐다.
일단 쌈장을 볶을 때 사용하는 웤이 큰 것이어야 한다. 어쩌면 웤보다는 큰 코팅 냄비가 더 낫다. 왜냐하면 볶을 때 죽을 쑬 때처럼 북덕북덕 끓어 쌈장이 밖으로 튀기 때문이다. 그리고 뚜껑이 있는 냄비가 더 좋다. 뚜껑을 덮고 저을 때만 뚜껑을 열면 된다. 그래야 끓어 넘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리고 고추청을 이용하여 쌈장을 만들 때는 레시피에서 말하는 물의 양보다 적게 해도 된다. 이미 청에서 나온 물기가 있기 때문이다.
하여간 청양고추 대환장 파티를 했다.
만능 장아찌 간장을 산 김에 양파나 다른 야채 스틱 장아찌도 담갔다. 마치 청양고추로 김장을 끝낸 집안 풍경 같았다. 뒷베란다에는 온통 청양고추로 만든 것들이 즐비해있다.
저녁에 P 집사님이 주신 꽃게 무침과 전라도식 포기김치는 물론 막 만든 청양고추 멸치 쌈장으로 식사를 했다. 집사님이 주신 반찬에도 청양고추가 들어가 있어 매콤했다. 남편은 꽃게 한 점을 먹더니 땀을 주르륵 흘렸다. 곧장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은 후 드라이기로 말리고 있었다. 그런 것을 보면 청양고추는 우리랑 안 맞는다.
그런데 완성된 쌈장을 맛보는데 기가 막힌 맛이었다. 남편도 그것을 맵다고 하지 않았다. 볶을 때 이미 매운 기운이 가신 모양이다. 남편은 야채 스틱을 그 쌈장에 찍어 먹으며, "이거 희한하게 맛있네"라고 했다.
그리고 오리 훈제를 그 쌈장에다 찍어 먹으며,
"당신, 이거 특허를 내도 되겠어. 맛이 끝내주는데? "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있자니 희한한 생각이 스쳐갔다.
이 땅의 삶이 끝난 후에 천국문 앞에서,
"세상에서 잘 살다가 왔느냐? 그래, 그곳에서 제일 맛있던 것이 무엇이더냐?'"라고 주님이 막간 질문을 하신다면 그때 나는 주저 없이,
"청양고추 멸치 쌈장!입니다."
라고 답할 것 같았다.
다음에 또 누가 청양고추를 준다고 하면 거절하지 않고 받아야겠다. 그리고 쌈장을 만들리라. 고추청도 만들고... 그리고 오지랖 넓게 지인들과 나눔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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