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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나의 어머니

(1) 기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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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기억을 어디 쯤 에서 부터 해낼 수 있을까? 내 유년의 끄트머리까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가장 아득한 곳에서 떠오르는 기억은 이것이다. 우리 집의 초가 지붕을 기와로 개량하던 날이었다. 아마도 내가 너댓 살 쯤이었던 것 같다. 가난이 뭔지? 인생이 뭔지? 그런 것에 대해 알지도 못하던 때였다. 기와를 이는 그날은 기분이 왠지 좋았다. 신이 났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와 이는 일을 돕느라고 우리 집에 모여 있었다. 어머니는 부엌의 흙바닥에 밥상을 놓고 한창 점심을 차리고 있었다.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상차림이라 평소보다 반찬 가짓수가 많았던 것 같았다. 학이 그려져 있던 사기 접시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지글지글 전을 부쳤던 어머니의 모습도 기억난다.

 

"정신 없어서 죽겠구만, 식찮은(시답잖은) 가시나(계집애)가 정지(부엌) 문지방에 서서 그게 무슨 짓이고?"

 

어머니는 앙칼진 목소리로 나를 혼냈다. 어머니에게는 기와를 이는 큰 일을 해내는 일이 중요했을 것이다. 내가 신이 나고 기분이 좋은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내 기억의 가장 밑바닥에서도 어머니는 일 중심적인 사람이었다. 어머니에게 나라는 딸은 그냥 시답잖은 계집아이였다.

 

"식찮은 가시나가 우리 장손 젖배 곯게 할라고 바뿌게 태어나 가지고!" 할머니는 막 해산을 끝낸 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할머니는 내가 손자가 아니고 손녀라는 것이 기분이 상했다. 내가 태어난 날, 할머니는 쇠죽솥 뚜껑을 신경질적으로 소리 나게 여닫으며 어머니를 구박하셨다. 누구는 연년생으로 태어나기도 하던데 나는 그래도 오빠와는 두 살 터울이다. 그런데도 어머니와 나는 그런 애먼 소리를 들어야 했다. 어머니는 할머니의 쓴소리에 도저히 누워있을 수가 없어서 몸조리도 못하고 당일에 곧바로 일어났다. 아무래도 나는 집안을 잘못 골라서 태어났다는 생각을 몇 번인가 했었다. 고명딸이 대접받는 것을 볼 때마다 부러웠다. 위로 아들을 하나 낳은 후에 태어난 딸인데도 나의 출생은 환영받지 못했다. 아들보다는 딸이 대세인 요즘에 생각하면 할머니는 이해되지 않는 분이다.

 

고향, 그 옛집은 방 두 칸, 부엌 하나인 초가 삼 칸 오두막집이었다. 작은 방 앞으로는 뒤주 곳간이 있었고 아래채는 소 마구간과 돼지 우리도 있었다. 통시(뒷간)는 돼지 우리 위에 나무 판대기를 밟고 올라갔었다. 큰일을 볼 때면 늘 허기진 돼지들이 꽥꽥거리며 통시 밑에서 난리 부루스였다.

 

할아버지는 삼 남매를 두고 일찍 돌아가셨고 할머니가 혼자서 그 험악한 세상에서 용케 사셨다. 할머니는 매년 이엉(짚·풀잎·새 등으로 엮어 만든 지붕 재료 또는 그 지붕)을 엮어서 지붕을 다시 이는 일을 연례 행사처럼 치렀다. 아버지 세대에 와서 마침내 초가를 기와 지붕으로 바꿨다. 기와를 이는 날, 나는 나무 짝으로 된 부엌문을 두 팔로 열었다 닫았다 하며 신이 나 있었다. 우리 집에 큰 경사가 난 것 같았다. 참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눈치를 챘었다. 그런데 사단이 났다. 그 나무 문짝은 어린 내가 젖혔다 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위험한 일이었다. 그만 문짝이 뒤로 훅 열리면서 나는 부엌 바닥에 차려져 있던 밥상 위로 곤두박질쳐졌다.

 

"식찮은 가시나가 이 바뿐 날에 일을 망쳐놓고... 무슨 일인고 모르겠다. 안 죽은 기 다행이다. 이만한 기 다행이다." 어머니는 기와를 이는 일이 망쳐진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성난 소리가 들렸다. 일꾼 점심 차리던 일은 제쳐두고 어머니는 나를 둘러 업고 장터에 있는 <쾌생의원>으로 달렸다. 나의 찢어진 이마는 마취도 하지 않은 채로 몇 바늘 건성건성 꿰매졌다. 입원이란 것은 언감생심이었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 등에 업혀서 허겁지겁 기와 지붕을 이느라 정신없었을 집으로 되돌아갔다. 내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머니가 우리 마을 어귀로 숨차게 당도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짜증을 내며 계속 나를 나무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그 순간은 내가 어머니에 대해 따뜻하게 느끼고 있는 단 한 번의 선명한 기억이다. 그 이후로는 어머니의 등이 내 차지로 될 턱도 없었고 지금껏 살포시 어머니께 기대어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곁을 주지 않았는지 내가 어머니를 밀어냈는지 모르겠으나 어머니와는 늘 머쓱한 사이였다. 다정하게 손을 맞잡아보지도 못했고 맘을 나누며 정답게 대화를 해보지도 않았다.

 

그날 밥상에 있던 사기 그릇 조각은 내 이마에 흉터를 남겼다. 그러찮아도 납작하고 볼짝(볼품) 것도 없는 나의 이마에 생채기가 생겼다. 살며시 앞 머리를 들추어 보면 2-3센티 정도의 초승달 모양의 흉터가 나의 이마에 세로선처럼 그어져 있다. 

 

고향, 그 옛 집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첫 기억은 아기자기하지 않다. 

[고향, 그 옛집]

 

[사진: 다음 로드뷰 챕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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