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어머니, 나의 어머니

(2) 오일장 장돌뱅이

728x90
반응형

어머니는 농사꾼으로 살다가는 자식들 교육을 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셨다. 또한 자식들에게 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당신의 자식들이 한평생 고생하며 살 것이라 여기셨다. 논에서는 벼농사, 밭에서는 채소를 수확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쌀바가지(지명)' 논 다섯 마지기 '띠뱅이(지명)' 밭 하나, 그리고 한 평 될까 말까 했던 앞산 밑에 있던 정구지(부추) 밭이 전부였다. 그야말로 5남매 입에 풀칠도 근근이 할 판이었다.

 

어머니가 농사일에서 눈을 돌려 장사를 시작한 것은 내가 아직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라고 지칭함)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나는 '고령장'에 가야 하니 옆집 아제 따라서 학교 댕겨 오거래이."

 

입학식날 아침에 어머니는 그 한 마디만 남기고 부리나케 고령장으로 향하셨다. 그날은 오일장 중에서 고령장이 서는 날이었다. 옆집 아재는 그 집 아들, 길철이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나를 잡았다. 집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던 초등학교 가는 길에는 3월의 바람이 심상찮게 불고 있었다. 설레는 맘과 두려운 맘이 범벅이 되어 바람과 함께 흔들렸다. 나의 왼쪽 가슴에는 가제 손수건이 꽂혀 있었다. 그 위에는 '1-2반'이라고 적힌 붉은 리본도 있었다. 그날 나는 초등학교에 부모도 없이 나 홀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날 이후로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부모님이 학교에 와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은 자녀 교육을 위해 열심히 사신다고 했지만 자녀들을 곰살맞게 챙기는 일은 전혀 하지 않으셨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한다면 나는 차라리 후자를 택하고 싶다. 물질적 서포터냐?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냐? 그것의 선택이다.

 

어머니는 가마니 떼기에 고무신 몇 켤레를 놓고 장사를 시작하셨다. 농사꾼이며 전업 주부였던 어머니가 장터 바닥에 나 앉아서 장사를 한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다.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무슨 여자가 집에서 밥이나 하고 농사일이나 하지. 장터 바닥에 나간다고? 쯧쯧, 자식 건사나 제대로 할 일이지."

 

어머니는 2일과 7일이 되면 오일장에서 고무신을 팔았다. 그러다가 아버지도 어머니의 장사에 합세했다. 부모님은 야로장, 가야장, 묘산장, 고령장, 합천장 등을 닷새 간격으로 돌았다. 농사꾼에서 장사하는 일에 곁눈을 팔았던 아버지는 신발 장수 외에 신문 보급소를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문 보급소를 운영하는 아버지를 '지국장' 혹은 '국장'이라 불렀다. 농사만 하는 사람들을 일컬어서 김 씨, 박 씨라고 부르던 때에 그 호칭은 뭔가 있어 보였다. 바야흐로 부모님께는 농사는 부업이요, 장사하는 일이 본업이 되었다.

 

장날이 되면 장터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어디에선가 조용히 살다가 장날만 되면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사람들이 장터로 몰려왔다. 벌집 쑤셔 놓은 풍경처럼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장이 서는 날이면 내게 가장 관심이 가는 곳은 풀빵 가게(사실은 '가게'가 아니라 풀빵 기계만 달랑 하나 있을 뿐이었다)였다. 알루미늄 주전자에 담긴 반죽을 빵틀에 적당히 부은 후에 팥 앙코를 한 꼬집 넣어서 구운 풀빵은 참 달달했다. 그 맛은 지금도 그립다. 풀빵은 내가 최초로 맛본 맛있는 간식이었다. 때때로 풀빵을 사 먹고 싶었지만 내게는 용돈이 없었다.

 

"미술 준비하려면 20원이 필요해요." 그렇게 해서 돈이 내 손에 들어오면 반은 남겨서 부모님 몰래 풀빵을 사 먹곤 했다. 10원이면 풀빵을 두 개나 사 먹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장날이 되면 나는 부모님 옆으로 가서 잔심부름을 했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때때로 잔치 국수 한 사발을 사주셨다. 매촌댁 국수 가게는 늘 가마솥에 멸치 육수가 끓고 있었다. 매촌댁은 면사리를 대접에 먼저 담고 뜨거운 육수를 끼얹은 후에 양념장을 살짝 얹어서 내 앞에 내놓곤 했었다. 풋고추와 쪽파 다진 것 위에 참기름 듬뿍 넣은 양념장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맛이었다. 매촌댁 국수전에서 맛본 잔치국수는 내가 처음으로 했던 외식이었다. 매촌댁 가게에서 먹은 국수는 별미 중의 별미였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잔치국수는 나의 최애 메뉴다.

 

부모님의 고무신 장사는 날로 날로 번창해 갔다. 점점 운동화, 슬리퍼 등 모든 종류의 신발을 다 갖추어서 파는 신발 가게로 바뀌었다. 더 이상 부모님은 이곳저곳 오일장을 찾아다니던 장돌뱅이가 아니었다. 시장 안에 판자를 덧대어 만든 신발 가게는 우리 가족사의 랜드마크 같은 곳이다. 산 너머에 살던 사람들조차도 줄지어 우리 가게에 와서 온 가족의 신발을 사곤 했다. 명절 대목이 되면 우리는 밤마다 돈을 셌다. 마대 자루에 든 종이돈을 꺼내어 부지런히 세다가 지쳐서 졸기도 했다. 그 고을 천지에 있는 모든 돈을 갈고리로 긁어모으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람들이 신발을 신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신발 가게는 그 인근에 오직 우리 것뿐이었다. 

 

그즈음부터 아버지는 틈나는 대로 '가시나집'(기생집을 고향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인 '한일관'이나 '천일관'을 들락거렸다. 탱자나무 울타리 너머로 들여다본 가시나집은 요지경이었다. 뽀글거리는 파마를 한 여자들은 빨간 입술에다 손톱까지 새빨갛게 칠하고 있었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콧소리로 웃는 여자들의 소리가 탱자 향과 함께 장터에 퍼지곤 했었다. 어머니는 족집게처럼 아버지가 어느 가시나 집에 있는지 알아냈다.

 

"미친 연놈들, 내가 팍 '×여' 뿌린다."

 

어머니는 수사반장처럼 의기양양하게 가시나집 여닫이 방문을 확 열어젖히곤 했었다. 아버지는 만취하여 거의 인사불성이었다. 마치 술래잡기에 들킨 자처럼 아버지는 늘 어머니의 감시망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버지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가시나집을 빠져나오곤 했다. 매일 해질녘이 되면 부모님의 술래잡기 같은 '숨고, 찾기'가 반복되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향하여 퍼붓던 욕의 무게는 트럭에 실으면 몇 톤은 될 듯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많이 퍼부었던 욕설의 레퍼토리는,

 

"× 끝을 가위로 싹둑 잘라 뿌러야 내가 살지, 이러고는 내가 못 산다. 내가 당장 술 약을 먹여 버릴끼다."라는 것이었다.

 

그 명탐정 같던 어머니가 알지 못했던 비밀 하나를 나는 알고 있다. 아버지가 윤자네 외숙모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나는 똑똑히 봤다. 윤자네 외숙모는 틈만 나면 우리 가게 앞에 와서 어슬렁댔다. 뽀얗게 얼굴에 분칠을 하고 껌을 씹고 있던 윤자네 외숙모에 대해 어머니는 전혀 눈치를 못 채신 것 같았다. 어머니가 알았더라면 윤자네 외숙모는 온 동네에서 우세를 당했을 것이고  더 이상 백주 대낮에 얼굴 들고는 살지 못했을 것이다.

 

끊어질 줄 모르는 국지전 같은 부모님의 싸움을 매일 보면서 살았다. 내 입맛은 체면도 없이 그런 전쟁 같은 삶 중에서도 장날이 되면 풀빵을 사 먹고 싶은 맘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우리 싸리채 꺾으러 갈래?" 후남이가 말했다.

 

후남이는 매일 '먼산'으로 싸리채를 꺾으러 다녔다. 후남이는 어머니와 함께 싸리채를 꺾어서 껍질을 벗긴 후에 장에 내다 팔았다. 껍질을 벗긴 싸리채는 광주리를 만들거나 바지게 만드는 데 쓰였다. 나는 단 한 번, 후남이를 따라가 싸리채를 꺾었다. 그것을 팔아서 번 돈으로 나는 어린 나이에 딴 주머니를 찼다. 풀빵 때문이었다. 내가 풀빵을 먹고 싶을 때면  몰래 비자금으로 사 먹을 수 있었다. 싸리채를 팔아서 풀빵을 사 먹어 본 후에, 돈을 벌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손쉽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알게 되었다. 돈이 좋은 것이라는 것도 알아버렸다.

 

 오일장 장돌뱅이였던 부모님은 하루도 쉬지 않고 장터에서 지지고 볶으셨다. 부모님이 해대던 부부싸움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집에서도 남 부끄러운 줄 모르고 다투셨다. 내가 봤을 때는 어머니가 더 심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버지도 어머니한테 욕을 먹었으면 그만 둘 일이지 멈추지 않고 욕을 먹을 행실을 하니 두 분은 서로 도찐개찐이었다. 그러니 집안 공기는 늘 불안했고 팽팽한 활시위 같은 긴장감은 가시지 않았다.

 

어머니의 자식 교육열 속도가 100미터에 10초라면 아버지는 50초는 됐을 것 같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버지 더러 자신과 같은 속도로 달리라고 채근하니 아버지는 자꾸만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었을 것 같다. 그곳이 가시나집이거나 윤자네 외숙모네였을 것 같다. 도망가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생지옥 같은 현실이 아버지를 괴롭혔을 것 같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말하자면 성인 군자 같은 자에게 야전 군사처럼 살라고 요구하는 짝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고향을 생각하면 그 옛 집에서 물건을 내던지고 서로 고함을 지르며 싸우던 부모님의 모습이 선하다. 괜스레 맘이 아린다.

[사진:픽사베이]

 

 

728x90
반응형

'어머니, 나의 어머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1) 기와집  (0) 2023.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