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어교사의 가지각색 삶

23. 어머니, 꽃구경가요!

728x90
반응형
'어머니'를 만나다

  시내버스를 타고 교회에 가던 일요일 아침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한 분과 눈이 마주쳤다.

  "아침부터 무슨 짐을 그렇게 잔뜩?"

이라고 묻는 듯했다.  '내 짐이 아니에요.' 나는 이 짐들과 무관하다고 눈짓을 보냈다. 내 발 옆에, 크고 작은 채소 뭉치 보자기가 보였다. 그 옆에는 의자용 보행기도 있었다. 그때 뒷좌석에 앉아 있던 어르신이,

  "내가 내릴 때 이거 좀 도와줘요."라고 한다. 돌아보니 짐이 한두 개가 아니다.

  "아, 네~, 아무 염려 말고 몸만 내리세요. 제가 다 들어서 내려드릴 게요." 나도 놀랬다. 나의 어머니가 늘 짐을 챙겨 들고 다녀서 그런 모양새가 참 싫었던 나였는데... 진심을 다해서 그분을 돕고 싶었다. 이윽고 버스가 정류장에 멎었고 옆에 있는 젊은 여자분은 나보다 더 적극적으로 짐 내리는 일을 도왔다.

 

  아침부터 어머니 생각이 난다. 그 어르신의 모습에서 내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가 쉴 틈 없이 일만 하는 모습이 나는 참 싫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해주는 맛있는 된장이나 고추장을 거절했다. 그래야 일을 벌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곡으로 만든 미숫가루도 싫다고 했다. 내가 맛있다고 하면 온 집안을 어지럽힐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 날의 어머니는 항상 본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짐을 가져 날랐다. 신발 도매상에서 물건을 사들여 올 때면 커다란 박스 여러 개를 완행 버스에 싣고, 오다가 환승까지 해야 하셨다. 혼자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야 했다. 때로는 길바닥에 내동댕이 쳐져 있는 박스 짐을 보고는 버스가 정차하지 않고 지나가버리기도 했다.

 

  농사를 지을 때도 어머니는 리어카에 잔뜩 농산물을 싣고 마을로 돌아오곤 하셨다.

  " 학골댁은, 아녀자가 장정 열 몫은 한다."

 그 모습을 보는 친척 어르신들은, 어머니가 억척같이 일을 해내는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사람이 힘으로 일을 하면 미련 것이야. 항상 머리를 써서 해야 하는 것이야."라고 말하곤 했던

어머니는 '일 머리'가 뛰어난 분이었다.

어머니는?

  어머니는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당신을 포기하신 분이었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어머니가 그러셨다.

   “니가 살 길은 공부밖에 없데이. 공부를 안하믄 니는 집안일 치다꺼리나 하다가 인생 끝낸데이.”

 

- 물상 문제지

  중학교 첫 시험에서, 모든 과목은 만점이었는데 물상(과학)만 하나 틀렸다. 어머니는 시골 서점에 특별히 주문하여 물상 참고서를 사서 내게 안겨주었다.

 

- 손목시계

  그 시절에는 귀했던 사각 손목시계를 사주셨다. 매달 쌀을 한 되씩 모으는 계를 타서 산 것이라고 하셨다.

 

- 꽃무늬 원피스

  양점에서 화려한 꽃무늬 원피스를 맞추어 주셨다. 키가 작은 딸이 맘에 걸려서 예쁜 옷을 입히고 싶었던 것이다. 부잣집 마나님이나 이용하는 양점에서 최고급 원단으로 원피스를 맞추어 주셨다,

  "니가 이뿌면 그만이다. 그거 입으니 이뿌네."

 

- 어머니의 돈주머니

 고등학교, 대학교 때 용돈을 받으러 고향에 가면, 어머니는 있는 대로 돈을 챙겨주셨다, 마지막에 꼭 한 번 더 우리를 부르셨다. 어머니는 앞치마 돈주머니를 홀라당 뒤집어 보이면서 남은 동전 몇 개라도 모두 챙겨서 쥐어주셨다.

  "동전 한 푼이라도 더 주고 싶다. 자식이 무엇인고?"

 어머니가 참 싫었다

  나는 어머니와 성격이 맞지 않았다. 특히 어머니가 악에 차서 큰 소리로 욕을 해대는 게 싫었다.

어머니는 할머니께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원망을 해댔다. 아버지와도 하루가 멀다 하고 다투셨다. 특히 둘째 딸이 변변찮게 사는 것이 맘에 걸려서, 둘째 딸과  그 사위만 보면 으르렁대셨다.

 

할머니께: "작은 아들이 빌려 간 돈은 언제 갚을 겁니꺼? 저 조카들을 나한테 다 데려다 놓고 그 연놈들은 퍼질러 놀고... 내가 이리는 몬 삽니더, 천벌을 받아 뒤×면 좋겠심더, 그 연놈들~"

 

아버지께: "비가 와서 멍석에 널어놓은 곡식들 다 떠내려갑니더, 집안일에 신경 좀 쓰이소, 내가 팍 죽어뿌야 속 시원하시겠능교? 맨날 기생집이나 나다니고 내가 이렇게는 몬삽니더, 당신 죽고 내 죽으면 다 끝납니더."

 

둘째 딸에게: "딸 중에 젤 이뿌고, 높은 공부시켜놨는데 그렇게 밖에 못 사나? 그렇게 살려면 차라리 죽×라 죽×, 그걸 신랑이라고 데불고 사나? 헤어져라. 혼자 사는 게 더 낫다."

어머니, 꽃구경 가요

  어머니는 셋째 딸과 함께 사셨다. 60평 아파트에 남부러울 것 없이 지내시면 되겠건만 고추장이나 된장을 담느라 집안을 온통 뒤집어 놨다. 그런 음식들을, 우리 남매들에게 보내는 것도 부족하여 친적들에게도 보냈다. 셋째 딸의 집은 늘 난장판이었다. 저녁 늦게 퇴근하는 딸은, 말없이 그 넓은 거실을 닦고 또 닦아야 했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한두 번 정신을 잃고 입원을 하시더니 뇌에 연화가 오기 시작했다.

 

 "나는 절대로 요양원에는 안 간데이, 나를 요양원에 보내면 나는 접시 물에 빠져서 죽을란다." 어머니 말씀에는 어폐가 있다. 접시물에 빠져서 어떻게 죽을 수 있는지? 하여간 어머니는 요양원에 가는 것은 싫다고 미리부터 유언처럼 외쳤다.

 어느 날,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옆 건물에 있는 요양원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셨다. 그곳에서 3년 정도 지냈고 오빠 내외가 틈나면 면회를 갔었다. 그러다가 코로나 때문에 면회가 사절되기도 하고 어쩌고 하여 어머니의 상태를 정확하게 챙기지를 못했다. 휠체어에 단정하게 앉은 상태로 잠시 면회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어머니의 뇌연화 현상은 날로 심해져서 요양원에서 퇴짜를 맞고 말았다. 고함을 지르고 다른 분들과 싸움을 하여 퇴원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어머니의 기억력은 너무나 또렷하여 모든 자녀들의 연락처를 다 외우고 계셨다. 치매 검사를 하면 연산 능력이 완벽하여 치매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자녀들에게 전화를 해대서 나는 진작부터 '수신 거절'을 해둔 상태다.

 

  요양원에서 나오는 어머니를 모시는 일로 형제들의 단톡방에서 의논을 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엄마가 그토록 욕을 퍼부어댔던 둘째 딸이, 자기가 어머니의 노후를 책임지겠다고 했다. 어머니의 상태가 어떻게 될지 장담을 할 수 없어서 일단 원룸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런데 그 둘째 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데가 없어서, 몸 자체가 시쳇말로 '종합병원'이다. 불면 날아갈 듯 깡 말라 있다.

 어머니는 한 걸음도 걸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픈 곳이 생기더니 마침내는 기저귀를 채워야 했다. 섬망 증세도 심해졌다. 요양사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둘째 딸이 시도 때도 없이 챙겨봐야 했다. 밤에도 새벽에도 가리지 않고 전화가 온다고 한다. 혹시 제때 전화를 받지 않으면 30~40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다고 한다.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그 어머니를 으르고 달래고 토닥여서, 둘째 딸은 입안의 혀처럼 어머니를 돌보고 있다. 이제는 둘째 딸에게 욕을 퍼붓지는 않는단다.

 "내가 니를 안 낳았으믄 으쨌겠노? 니 같은 효녀가 세상에 어디 있노?"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는 행복할지라도 연약한 몸으로 간병을 하는 둘째 딸은 너무나 버거운 일이다. 체위 변경을 하고 대소변을 갈아주다 보니 딸은 인대에 무리가 와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장상익의 꽃구경]

 그런데 올 것이 오고 말았다. 둘째 딸이 오미크론에 확진이 되었다. 요양사가 전적으로 어머니를 돌보기로 했다.  그런데 딸이 격리되어 있는 동안에 어머니는 한 번도 딸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그런 걸 보면 정신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어머니의 둘째 딸, 내 여동생이 격리가 끝나는 날 말했다.

 "엄마가 너무 불쌍해. 내가 격리되어 있을 동안에 얼마나 외로웠을까? 내일은 엄마를 휠체어에 싣고 꽃구경 갈 거야."

 기저귀 차고 정신도 맑지 않은 그 어머니와 꽃구경을 가겠다 하니,

'어머니, 꽃구경가요.'라는 '장사익'의 노래 가사가 생각난다. 가슴이 뜨끔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X_Dwp_vYzvE :

꽃구경 영상[출처: KBS 골든 케이팝:불후의 명곡(22.2.26)]    

 

후회막급(後悔莫及), 불효막급( 不孝莫及)

  후회막급(後悔莫及), 불효 막급( 不孝莫及)한 자식이다. 동생이 혼자서 저토록 애를 쓰는 데 한 번씩이라도 교대를 해줄 수 없는 내 상황이 안타깝다.

나는 어머니께 크게 세 번 불효를 했다.

 

- 미발령

 “나라에서 하는 일이니 니가 환갑이 되기 전에는 발령이 나겠지?” 하며 어머니 스스로 실망의 나락에서 헤어 나오려고 애를 쓰셨던 것 같다. 미발령교사들이 부전공 연수 코스를 밟고 임용고사를 통과하여 교사가 되는 특별법이 한시적으로 실행되어, 나이 46세에 신규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어머니가 무척 기뻐하셨다. 하나의 불효를 그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

 

- 아들 사고

  대학에 다니던 아들이 자전거에서 넘어져 뇌를 크게 다쳤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적 불능한 상태로 침상에 누워 지낸다. 몇 년간 어머니한테는 그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어머니는 내 아들을 보면, 유독 잘난 외손주라며 볼 때마다 자랑스러워하셨다.

 “니가 낳은 아들 맞나? 니가 우째 저렇게 잘 생긴 놈을 낳았노? 조선에 저런 인물이 어디 있노?”라며 어머니는 손주를 감격에 찬 눈으로 바라보곤 하셨다. 손주가 절체절명의 심각한 상태인지도 모르시고 그냥 일상생활을 하지 못하고 병상에 있다고만 알고 계시는데도, 손주를 생각만 하면 어머니는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런 불효가 또 있으랴?

 

- 수신거절

 전화기를 통하여 들려오는 끝없는 어머니의 독설과 한탄이 더는 견딜 수 없어서 나는 어머니의 연락처를 수신 거절로 설정했다. 혹시 통화가 되더라도 가는 귀가 어두서 내가 하는 말은 한마디도 듣지 않으시고 당신 말만 늘어진 카세트테이프처럼 반복하셨다. 아들 일로 감정을 조금만 다쳐도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어머니를 '거절'했다.

  요양원에서 나온 이후로 상태가 점점 나빠진다는 말에 어머니와 소통하려고 불원천리 진주까지 달려갔더니 어머니는 나를 똑똑하게 알아보셨다. 그동안 나긋하게 대하지 못했던 것이 죄송하고 부끄러웠다. 그 상황에서도 어머니는 내 걱정만 하신다.

 

  '꽃구경'이라는 노래 가사는, 아들이 어머니를 등에 업고 고려장을 하러 가는 내용이다. 그 상황을 알아차린 어머니는 그래도 그 아들이 돌아갈 때 길을 못 찾을까 걱정되어 솔잎을 뿌려서 길을 예비한다. 어머니를 등에 업고 가는 그 '아들'이 바로 나인 듯하다. 이미 닿을 수 없는 곳에 어머니를 앉혀 놓고 있었다. 현대판 고려장?을 소리 없이 감행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든다. 불효의 끝판이다.

 

  어머니 형편만 되면 갈게요. 어머니가 살아계시니, 아직은 어머니께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어서 다행입니다. 사랑해요.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