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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교사의 가지각색 삶

저더러 '자존감 도둑'이라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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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발단은 이랬다.

그즈음에 날씨가 갑자기 더워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에어컨을 켜기에는 약간 이른 감이 있었다.

예배 시간에 더위를 많이 타는 분들을 위해 개인용 선풍기를 준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게 클립형 미니 선풍기가 생각이 났다. 그것은 아들이 6년간 병원생활할 때 사용했던 것이다.

 

'그게 딱일 것 같아.'

[사진 출처: 쇼핑 하우]

 

더위를 타는 성도들 앞에 그 미니 탁상용 선풍기를 꽂아두기로 했다.

 

그래서 커다란 토트백에 미니 선풍기 몇 대를 챙겨 담았다. 주중에 교회에 들르는 남편에게 그것을 교회에 가져다 두라고 했다.

 

 

일요일 아침에 일찌감치 교회에 도착해 보니 토트백에 선풍기가 얌전히 담긴 채로 그대로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이렇게 그대로 가져다 놓기만 하면 누가 선풍기를 세팅하게 될까요? 결국 내가 해야 하는 거네요? 당신은 속 편해서 좋겠어요.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 이것을 다 알아서 하니…"     

 

사실 황당했다. 선풍기를 들고 갔던 남편이 멀티탭을 챙겨서 적당한 위치에 꽂아 둘 줄 알았다.   

   

"당신이 뭐든지 알아서 잘하잖아. 괜히 내가 해봤자 당신 맘에 들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다. 성질 급한 내가 뭐든지 척척 알아서 하니 남편은 매사에 나에게 일을 미루는 버릇이 있었다.    

 

"바로 선풍기를 돌릴 수 있도록 해놨어야죠."      

 

나는 작은 소리로 투덜대며 멀티탭을 찾아서 탁상용 선풍기들을 세팅했다.     

 


 

남편은 집안일을 스스로 알아서 할 줄 모르는 편이다. 

 

아니다. 어쩌면 남편이 하기도 전에 내가 집안일을 알아서 해치워버렸던 것 같다.   

  

예배 후에 성도들과 함께 점심 식사하는 중에 내가 미니 선풍기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모두들 웃으면서 각자 한 마디씩 했다.      

 

한 집사님이,

 

"그거 가져다 두라고 말씀하셨을 때 세팅까지 하시라고 했어야죠."라고 말했다.   

  

또 어떤 분은,

 

"사모님이 늘 알아서 그런 걸 하니 목사님이 하지 않으시는 거죠."라고 했다.   

  

정작 당사자인 남편조차도,

 

"집사람이 그런 거 알아서 잘하니..."라고 말했다.     

 

그때 내가 덧붙여서,

 

"다른 K 집사님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선풍기도 본인이 챙겼을 것이고 마무리 세팅까지 끝내주게 하셨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남편은 일상의 일을 대체적으로 내게 미루는 편이다. 11년째 투병 중인 아들이 사는 아파트에 잔손이 많이 간다. 손볼 일이 생길 때 아들을 돌보는 '활보쌤'들이 남편에게 부탁하는 말을 하면,    

 

"우리 집사람이 할 거예요."라고 한단다.

 

그래서 활보쌤들 사이에 유행어가 있단다. 남편의 십팔번은 ‘우리 집사람’이란다.     

 


 

어쨌거나 그날 식사 자리에서 웃으며 선풍기에 얽힌 해프닝을 말했고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딸 내외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딸이 진지하게 말했다.     

 

"혹시 ‘자존감 도둑’이란 말 들어보셨어요?"라고 말했다.

 

"아~니, 근데 그게 뭐지?" 그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오늘 엄마가 하신 행동이 전형적인 ‘자존감 도둑’이었어요."

'옴마야, 살다 살다 딸한테 도둑이란 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등에서 땀이 주르륵 흐르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아빠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빼박 '자존감 도둑'이에요."     

"아, 알겠네. 내가 뭔 짓을 했는지... 이해가 되네. 내가 잘못한 거 같네."

 

그래도 조금의 위로를 받을까 하여 사위한테 물어봤다.

 

"오늘 내가 한 얘기가 자존감 도둑의 전형일까?"

"그렇죠."

사위도 주저 않고 딸의 생각에 동의를 했다. 

 

"어? 난 그런 생각 안 했는데?" 남편이 말했다.

 

정작 당사자인 남편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건 아마 당신이 나한테 계속 '가스라이팅'을 당해서 그랬을 것 같아요." 이미 백기를 든 나는 남편에게 미안한 맘이 들었다. 그리고 남편이 그런 나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스라이팅이란 말이 그 상황에 맞는 표현이었을까? 하여간 남편은 얘기가 그렇게 까지 진행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냥, 엄마는 웃자고 한 말이지."남편은 끝까지 나를 탓하지 않았다.

"사실, 그때 저녁 시간이 임박하여 그냥 가방째로 두고 나왔어." 남편 딴에는 선풍기 담은 가방을 열어보지도 않고 두고 온 이유가 있었다. 

 

"아니에요, 아빠, 웃자고 해도 다른 사람을 디스 하면서 웃기면 안 되죠." 딸의 말이 백번 맞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지 않고 웃기기는 쉽지 않은데?" 와우, 남편은 끝까지 나를 두둔하고 있었다.

 

남편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다. 남편은 어쩌면 '자존감 부자'일 지도 모른다. 아내가 자신의 자존감에 스크래치를 내도 별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인 게 분명하다. 

         

"고맙다. 알려줘서, 생각해 보니 무심코 다른 사람들의 자존감을 훔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거 참 부끄럽네." 그날 나는 가족들 앞에서 창피를 당했다. 곪은 부분을 도려내고 새살을 돋아나게 하듯 진통을 겪었다고 생각했다.

 

딸이 엄마를 생각해서  지적해 준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부끄럽지만 그 '자존감 도둑'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딸 내외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니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었다.

 

'자존감 도둑'은 자신의 부족한 자존감을 다른 사람에게서 훔쳐오는가 보다. 또한 자신을 자화자찬하는 것도 부족한 자존감을 채우려는 행동인 것 같았다. 자신이 열등하니 자신을 높여 보이려고 자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도 배울 것이 여전히 .

앞으로는 자존감 도둑질을 하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워야겠다.

 

그날 나는 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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