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1박 2일 여행을 떠나 보지 못했다. 그 지긋지긋했던 코로나도 잠잠해졌으니 틈을 내어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맘이 슬슬 올라왔다.
그러나 연휴에 집을 나서면 극심한 교통 정체 때문에 길에서 진을 빼기 일쑤였다. 우리는 길에서 '교통 잼'이 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래서 집에서 한 시간 이내에 당도할 수 있는 영종도로 떠나는 여행을 선호한다. 그곳에는 <교직원 수련원>이 있다. 일 년에 몇 번씩 그 수련원을 별장처럼 이용해 왔다.
6월 연휴에는 잠시라도 짬을 내어 일상을 떠나보고 싶었다. 교직원 수련원 예약 신청 화면은 '예약 완료'라는 빨간 글씨로 꽉 차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예약을 취소하는 사람이 있겠다는 생각으로 시시때때로 수련원 사이트에 접속해 봤다. 그러던 어느 날, 객실 한 개가 '예약 가능'이라는 초록색 글씨로 바뀌어 있었다. 광속 클릭하여 객실 하나를 예약했다. 황금연휴에 바닷가 별장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생각만 해도 맘이 설렜다. 역시 여행은 떠나기 전부터 즐거운 것이었다.
'심봤다!'
예약 신청을 알리는 메시지를 받고 맘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우리의 영종도 여행 코스는 대체적으로 비슷했다.
체크인을 끝내고 나면 제일 먼저 을왕리 해수욕장 해변길을 돌고 그다음은 틈나는 대로 수련원 내에 있는 포켓볼이나 탁구를 치며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체크 아웃을 하면 대무의도에 들러 하나개 해수욕장 해변 데크길을 걸었다.
대무의도를 빠져나와 소무의도에 들른 후에 무의대교 입구에 있는 셀럽 베이커리 카페에 들른다. 마치 우리가 셀럽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곳이다.
그리고 냅다 달려서 반드시 번호표부터 뽑아야 하는 유명한 황해 칼국수에 들르곤 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일상으로부터 잠시 떠날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늘 좋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다시 일상을 정복할 수 있겠다는 에너지가 충만해졌음을 느끼곤 했다.
[사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더라도 '아들'에 대한 생각은 떨칠 수 없었다. 11년째 '인지'도 없이 중증환자의 상태로 투병 중인 아들 걱정이 우리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래서 올해 연초 나들이 때, 물 빠진 모래사장 위에 원색적인 우리의 소원을 적었다. 파도는 시샘하듯 우리의 소원을 조금씩 지워 버렸다. "임*양, 올해는 일어나"라고~]
그런데 얼마 전에, 한나절 여행 코스로 발견한 곳이 있는데 바로 영종도 미단시티에 있는 예단포항이었다. 바닷가 산책길이 예뻐서 언제라도 가 보면 정겨울 듯했다.
그래서 이번 1박 2일 여행에서는 무의도로 향하던 코스 대신에 예단포항에 들르기로 했다. 산책길 끄트머리에는 팔각정이 있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거기서 한 번 쉬었다가 산책길을 휘감아 내려가든지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샌드위치 연휴라 그랬는지 의외로 예단포항 바닷가 산책길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우리가 팔각정에 도착했을 때는 달랑 우리뿐이었다.
하늘에는 헬기가 큰 잠자리처럼 날고 있었다. 바다에는 작은 배가 유유히 떠 있었다.
남편은 하늘과 바다 그리고 꽃과 바람에 잔뜩 취한 표정이었다. 남편이 바다를 향하여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마지막 석양빛을 깃폭에 걸고
흘러가는 저배는 어디로 가냐
해풍아 비바람아 불지를 말아
파도소리 구슬프면 이 마음도 구슬퍼
아- 어디로 가는 배냐
아- 어디로 가는 배냐
황포 돛대야
"그냥 버스킹 한 번 해요. 휴대폰에서 MR 켜고 부르면 되잖아요 ㅎㅎ"
"그럴까?"
"좋아요. 나는 사람이 오는지 망을 볼 테니 당신은 무인도에 있다 치고 맘 껏 크게 불러요."
노래하는 자와 듣는 자 한 사람뿐인 특이한 버스킹이었다. 간간이 총 쏘는 소리, 파도 소리, 헬기 소리가 박수를 대신했다. 게다가 바람소리와 새소리가 반주처럼 범벅이 됐다. 세상에 하나뿐인 버스킹 녹음 파일이 완성되었다.
절친에게 여행 근황도 알릴 겸 버스킹 녹음 파일을 전송하려고 나무 그늘 아래 있는 벤치에 앉았다. 그런데 떼구루루 뭔가가 내 무릎에 떨어졌다.
"엥 이게 뭐야?"
무릎에 떨어진 것은 벌레가 아니라 손가락 굵기 정도의 오디였다. 새까만 오디는 탐스러웠다. 먹음직스럽기도 했다. 벤치 위를 올려다보니 아름드리 뽕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다. 올라갈 때는 그 나무를 미처 보지 못했다. 때마침 내 무릎 위에 오디 하나가 떨어져 뽕나무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나무는 성경에 나오는 삭개오가 올라갔던 뽕나무보다 배나 클 것 같았다.
"심봤다!"
나는 허겁지겁 오디를 줍기 시작했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화수분처럼 온통 오디 천지였다. 남편도 덩달아 오디를 주웠다. 반은 입으로 가고 반은 손에 모아 담았다. 풀숲에 가득한 오디를 다 주우면 몇 근도 될 듯했다. 그러나 담아갈 그릇이 없었다. 그렇다고 자동차가 있는 곳까지 내려가서 비닐봉지를 챙겨 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순풍에 돛을 달고
황혼 바람에
떠나가는 저 사공
고향이 어디냐
사공아 말해다오 떠나는 뱃길
갈매기야 울지 마라
이 마음도 서럽다
아- 어디로 가는 배냐
어디로 가는 배냐
황포 돛대야
소심한 A형 남편은 또 저랬다. 자신이 부른 노래에 실수한 곳은 없는지 확인해 보려는 듯 오디를 주우며 자신의 버스킹 녹음 파일을 켰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남편이 불렀던 것이라고 알 턱이 만무했다.
어? 그런데 그 버스킹 노랫소리 때문인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러다가 '어, 이거 뭐야?' 하면서 오디를 줍기 시작했다. 순간 그 뽕나무 아래는 오디 줍는 사람으로 가득해졌다. 남편은 버스킹 녹음 파일을 그대로 켜고 있었다. 간접 버스킹이었다.
아무튼 떨어져 있는 오디는 많았지만 담아 올 그릇이 없어서 위생장갑과 핸드타월에 담았다. 그날따라 6월 초순의 바람은 시시때때로 불어제쳐 뽕나무를 흔들어댔다. 후드득거리며 오디가 비 오듯 떨어졌다. (6월 초순에, 영종도 미단 시티 예단포항에 있는 해변길 산책로에 가면 오디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아무것에나 우유를 타면 라떼가 되는 세상 아니던가?
귀한 자연산 오디를 우유와 함께 갈아서 오디 라떼를 만들었다. 그 라떼를 마시며 인간미 폴폴 나는 버스킹 파일 - 황포돛대를 들으니 그 바닷가 풍경이 떠올랐다. 멋진 카페가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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