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방학이 시작되기 전부터 알림을 받았다. 2월 말, 송별회를 앞둔 하루 전날에 뮤지컬을 본다고... 학교 업무 부서 부장단들의 해단식으로 마련한 이벤트였다. 그 자리에 퇴임을 맞는 우리들도 초대되었다.
참 오랜만에 보는 뮤지컬이라 일단 맘이 설렜다.
내가 처음으로 감상한 오페라는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된 <나비부인>이었다. 오페라의 장엄하고 웅장함에 감동을 받은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돈이 아깝지 않다."
라고 했었다.
그래서 가족들을 이끌고 '예술의 전당'에 한 번 더 간 적이 있다. '예술의 전당'이란 곳을 경험해 보게 하고 싶은 맘이었다. 지하철을 갈아타며 고생하여 갔던 그 뮤지컬은 어린 자녀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고 남편도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홍도야 울지 마라>라는 뮤지컬이었는데 우리 가족 누구에게도 어울리지 않는 컨셉이었다. 그 뮤지컬을 본 것은 낯부끄러운 추억이다.
그 뮤지컬 관람에 대한 실망을 누그러뜨린 것은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보았던 뮤지컬, <라이언 킹>이었다.
상당히 비싼 티켓을 값(풀 프라이스:Full Price)을 지불하고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애니메이션으로 수도 없이 봤던 그것을 뮤지컬로 표현한다고? 그게 가능하다고? 애니의 장면을 어느 정도까지 표현할까?라는 맘으로 공연장에 갔다.
<라이언 킹> 뮤지컬 공연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디즈니 만화를 입체적으로 무대에 올렸다고 하면 어울리는 표현일 것 같았다. 소울 풍성한 흑인들의 노래가 폐부까지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이후 그 공연단이 한국에도 들어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정만 된다면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송별회 전날, 우리가 볼 뮤지컬은 우리말 버전 <노트르 담 드 파리(Notre-Dame de Paris)>였다.
뮤지컬 공연 감상을 하기로 한 하루 전날, 상조회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공연 감상에 앞서 점심 식사까지 함께 한다고... 이런 황송한 송별 선물이 어디 있을까? 일 년에 한 번 가볼까 말까 한 일정식집 <삿포르>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일단 쌓인 우정을 풀어놓으며 맛있게 식사를 끝냈다. 그 이후에는 공연장인 '세종문화 회관 대극장'까지 각자 도생하기로 했다. 우리 팀은 광역버스를 타고 갔다가 광화문까지 가는 전철을 이용했다. 그 발걸음 하나하나가 두근거렸다. 이제 이후로는 다시는 없을 고별 여정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VIP석에서 뮤지컬을 감상했다. <홍도야 울지 마라>를 봤던 무대와는 품격이 많이 달랐다.
그런데 보는 내내 북경에서 봤던 GOLDEN MASK 무대기법과 흡사한 느낌을 받았다. 혹시 그 뮤지컬에서 벤치마킹을 했나 싶었다. 북경의 뮤지컬은 공연하는 동안에 촬영을 해도 무방했다. 그러나 '노트르 담 드 파리' 공연에서는 '커튼콜' 타임에만 촬영이 가능하다고 안내했다.
온종일 궂은 날씨였다. 그렇지만 송별 선물로 함께 감상하는 뮤지컬 관람에 어울리는 날씨이기도 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자꾸만 맘 속에서 올라왔다. 어제까지 한 솥 밥을 먹던 동료들과 이제는 아주 딴 사회생활을 하며 남은 여생을 보낸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 맘으로 거리를 보니 시가 절로 나왔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시 한 수를 적어 보았다.
https://brunch.co.kr/@mrschas/441
뮤지컬을 보는 내내 꼽추에 대한 연민이 솟았다.
그러면서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여고 동창 O도 생각났다.
O는 꼽추였다. 그러나 영리하여 공부를 잘했다. 사범 대학 국어과를 졸업하여 국어 교사로 재직했었다. 어느 날 O가 중병에 걸렸다는 얘기를 J로부터 전해 들었다.
10여 년 전의 일이다. J는 O가 입원한 병원을 알려 주면서 한 번 가보라고 했다. 그런데 그때 나는 아들이 큰 사고를 당하여 사경을 헤매고 있던 중이라 누구를 위로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O를 만나러 갔다 해도 아무런 위로가 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이 뮤지컬을 보는 내내 O가 생각났다. 그렇게 가버릴 줄 알았더라면 내 아픈 마음일랑 접어두고 그녀를 한 번 찾아갔어야 했는데...
"그녀가 떠난 마른하늘을 젖은 눈으로 바라본다."
라고 O의 마지막을 알리며 절친 J가 문자를 보내왔었다.
꼽추는 오래 살 수 없는 건가?
꼽추이자 추한 외모를 지닌 대성당의 종지기 콰지모도는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몸서리치면서 자신이 맡은 일을 하고 있었다. 소외된 삶의 한가운데서 허우적대는 콰지모도를 보며 내 주위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잊을 수 없는 송별 선물을 받았다.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을 나오면서, 일 년에 몇 번 정도는 금식을 하여 돈을 모아서라도 뮤지컬 한 편은 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온몸에 서려 있었다.
뉴욕 브로드 웨이에서 <라이언 킹>을 봤을 때도 같은 생각을 했었다.
돈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그날 나는 온몸이 행복에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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