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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에서의 날이 밝았다. 순방 같았던 그 일정의 하이라이트, '어머니를 뵈러 가는' 날이었다.
그날은 1월 중에 가장 바쁜 날이었다고 '타임라인 알림'이 왔다.
동생 내외는 출근했고 우리 부부만 아침 식사를 했다. 주인 없는 집에서 밥을 챙겨 먹었다.
평소 아침을 제대로 먹지 않지만 제부가 정성으로 준비한 요리를 맛이라도 봐야 할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내가 먹어본 청국장 중에서 제일 맛있는데..."
제부는 청국장 맛으로 남편을 감동시켰다. 남편은 밥을 두 그릇이나 해치웠다.
나는 남편과는 달랐다. 뭔가 내키지 않았다. 까다롭기 그지없는 내가 스스로 질린다. 남편처럼 맛있게 먹으면 좋으련만, 나는 그런 게 잘 안 된다.
"참 별나다. 별쫑스럽다."
남달리 까탈스럽던 나를 향해 어머니는 늘 핀잔하시곤 했다.
요양원에 가져갈 과일을 샀다. 요양원은 시내를 약간 벗어난 곳에 있었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내가 다녔던 진주 여고 쪽을 지나가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담임 선생님은 나의 진학에 대해 특별히 신경을 많이 쓰셨다. 뭐니 해도 내 진학에 영향력이 컸던 것은 바로 어머니였다.
면 소재지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선생님 몇 분이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밤중이었다.
"우리 학교에 오면 대학도 책임지겠다."라며 고향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를 강청했다.
"그런 사람들 말은 믿지 마라. 종이 한 장이면 하루아침에 다른 곳으로 가는 분이다.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가거라. 사람은 큰 물에서 놀아야 한데이." 어머니는 고향에 있던 신설 고등학교는 그냥 학벌이나 따기 위해서 가는 곳이라고 하셨다. 당시에 명문여고였던 마산/진주 여고에 진학하라고 하셨다.
인근 거창에서도 몇 분의 선생님이 나를 찾아왔다. 빵집에서 만났다.
"우리 학교에 진학하면 대학은 물론 미국 유학까지 책임질 수 있다. 미국에 졸업생들이 많다."라고 그 선생님들이 나를 설득했다.
"허허 별일이네. 학생 하나 데리고 가서 뭘 하게?"
아버지는 기쁨 반, 의심 반인 얼굴로 야릇한 웃음을 지으셨다.
"그냥 진주나 마산으로 진학해라." 어머니의 생각에 흔들림이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 대구가 있었지만 행정구역이 달라 그곳으로는 진학이 불가능했다.
가야산 골짜기에서 진주나 마산에 가려면 완행버스로 8시간이 족히 걸릴 때였다. 거의 유학 수준이었다. 아득하고 먼 곳이었다.
때마침 나는 진주에서 열린 '도 대회' 백일장에 참석했다. 군 대표로 진주에 갔다. 그때 3명의 여중생을 우연히 만났다. 그들은 독창, 반주자, 그림 대회 참가하러 왔다고 했다. 그 당시 나의 성향은 'I'였다. 촌뜨기, 그런 촌뜨기가 없었다. 숫기가 꽝이었다. 그런데 무슨 용기로 그들에게 나의 진학 고민을 말했을까?
그 셋은 나더러 진주여고에 진학하라고 침이 마르도록 설득했다. 그 이야기를 브런치 글로 발행한 적이 있다.
https://brunch.co.kr/@mrschas/2
결국 나는 진주여고에 진학했다.
그런데 입학하여 그 3명을 진주여고에서 만났다. 그중의 한 명은 우리 동기 중 수석 입학생이었다. 그녀는 입학식 때 대표 선서를 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의사였다. 야코가 팍 죽었다. 나는 여고에 다니는 내내 그와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미리 주눅이 들어 버렸다.
내가 진주여고에 진학한 것이 시발점이 되어 동생들과 오빠도 진주로 하나, 둘 오기 시작했다. 물꼬를 터 놓으니 밀려들어 오는 물같이 우리 5남매는 모두 진주로 왔다. 그냥 내가 내디딘 발걸음이 우리 형제들에게는 미래의 발판이 됐다.
세월이 흘러 어머니가 진주에서 생을 보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 면에서 인생은 깜깜이다. 마치 구약 성경에 나오는 요셉이 먼저 애굽살이를 시작하고 그의 형제들이 이어 모두 애굽으로 갔던 이야기와 흡사했다.
어머니의 요양원은 진주 여고를 지나 언덕으로 넘어갔다. 야트마한 산속으로 때 이른 봄기운이 기어 들어오고 있었다. 여고 시절에 느꼈던 봄바람과 매한가지였다. 만감이 교차했다.
이윽고 우리는 요양원에 도착했다. 듣기로는 그 요양원에 입소하려면 1년 정도는 기다려야 한단다. 평판이 좋은 곳이었다. 다행히 어머니는 그 요양원에 운 좋게 잘 안착하셨다.
키트로 코로나 검사를 한 후에 우리는 현관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휠체어에 실려 병실에서 나오셨다.
"오늘이 15일인가? 오늘이 15일 맞나?"
정신이 온전치 않은 분이, 멀리 사는 '딸이 15일에 온다.'는 말을 기억하고 학수고대하셨던 모양이었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어머니께 따사롭게 대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가 됐다. 늘 툴툴거리기만 했던 것이 죄스러웠다. 덥석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늦었다고 생각할 그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게 퍽 다행이었다. 어머니의 손은 뼈만 앙상했다.
아, 나는 몇 번인가 어머니가 그 손등으로 눈물을 닦는 것을 훔쳐본 적이 있다. 그때는 왜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했을까? 아, 왜 저래? 정말, 이런 감정으로 어머니를 원망하기만 했다. 좀 조용히 살면 안 될까? 이런 생각을 하며 어머니를 탓했다. 그때는...
아버지가 천일관에서 여자들과 놀았던 날, 아버지가 웅이 엄마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을 때, 아버지가 등잔을 집어던져 어머니의 눈두덩이가 찢어졌을 때, 어머니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오빠가 재수하게 됐을 때, 할머니가 복장 터지는 말을 했을 때, 어머니는 연탄 배달하던 손으로, 연탄집게를 양손에 집었던 그 시꺼먼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연탄 가루가 눈물에 반죽이 되는 걸 그냥 물끄러미 봤던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를 안고 함께 울었어야 했다. 나는 엄마의 눈물을 닦아드렸어야 했다.
"엄마!"
어머니의 손을 잡고 조용히 '엄마'라고 불렀다. 아, 이 말처럼 예쁘고 성스러운 말이 세상에 또 있으랴?
그 한마디 속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었다.
내가 맘을 담아 '엄마~'라고 불렀는데도 어머니는 울지 않으셨다. 우셔야 하는 순간이었다. 기다리던 딸 내외가 왔는데... 웃지도 않으셨다.
어머니는 감정을 주관하는 뇌 부분이 망가지신 듯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나와 남편을 또렷이 쳐다보시는가 싶더니 우리를 정확하게 알아보셨다.
"ㅇㅇ(중증환자로 누워있는 나의 아들)이는 어쩌고 왔노? 학교는 안 가도 되나?"
"ㅇㅇ는 잘 있어요. 지금은 방학이구요."
"△△(나의 딸)는 잘 살제?"
"네네 최서방과 꽁냥꽁냥 잘 살아요."
어머니는 아주 정상이었다. 어머니의 정신은 맑고 맑았다. 섬망 증세가 심하여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전해 들었는데 우리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어머니~
그러다가 잠시 어머니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셨다. 어머니의 새까만 동공을 바라보니 가슴이 막혔다. 그 눈동자는 12년 동안 세미 코마 상태로 누워 있는 아들의 눈동자와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와 아들의 눈동자가 레이저 쇼를 하듯 동시에 나를 바라보는 듯한 환상에 한 순간 빠졌다.
요양원 규칙상 30분 정도의 면회 시간이 허락됐다. 살아계신 어머니를 언제 또다시 뵐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울컥 솟았다.
인생이 이런 건가?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내 앞에 있다. 어머니의 마지막을 그냥 시간을 보내며 기다려야 하고... 아들의 기약 없는 병상 생활도 묵묵히 감내해야 하고...
늘 어머니를 위해 기도한다. 어머니가 기도하고 계실 그 기도 제목에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응답해 달라고...
어머니의 첫 번째 기도는 내 아들에 관한 것일 게다. 어머니가 아직도 목숨 보전하며 살아 계시는 이유는 그 기도를 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이기적인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내가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가 아직 살아계시기 때문이리라. 산자를 위해서만 기도 할 수 있잖은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면 나는 더 이상 어머니를 위해 기도할 수 없다. 기도할 필요도 없다.
어머니의 작은 눈에 흰 동자는 거의 없고 눈 속 전체가 까맸다. 아기의 눈을 보면 눈동자만 가득한 것과 흡사했다. 어머니는 내가 온다고 밤새 잠을 설쳤는지 정작 나를 봐야 할 때는 졸려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셨다. 이제 이후로 어머니는 더 나아지긴 어려울 것 같았다. 시간이 가면 어머니는 진이 다하여 호흡을 멈추실 것 같았다. 추상같았던 모습은 간데없고 앙상하고, 아기같이 작아진 어머니는 내게 익숙지 않았다.
어머니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아직은 어머니가 살아계시다는 것이 감사했다. 그럴 때마다 초점을 잃은 어머니의 까만 눈동자가 아스라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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