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지내는 요양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맛집을 예약해 두었다. 가정집을 개조하여 '집밥'을 내오는 식당이었다. 진주에 방문하기 한 달 전쯤에 미리, 선배와 친구에게 간단한 톡을 보냈다. 혹시 시간이 된다면 그 식당에서 만나 점심이라도 함께 먹자고... 사람이 시간을 낸다는 것은 쉬운 듯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방문객'이라는 시를 참 좋아한다. 선배와 친구가 그날 과연 나올 수 있을까? 사람이 온다는 것은 어마한 일이라는데... 그의 일생이 오는 것이고, 마음이 오는 것이란다.
방문객(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약속했던 식당에 도착하니 선배와 친구(들)가 나와 있었다. 내 친구 A와 K, 그리고 선배 H를 오랜만에 만났다. 모두 제 시간(on time)에 와 있었다. 사실 선배와 친구는 직접적으로 친분이 있던 사이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같은 교회를 다녔다는 공통점이 있긴 했다. 그리고 우리는 '여고 동문'이다. 그래서 한 자리에 있어도 크게 불편하지는 않을 듯했다. 내가 진주에 갈 때면(그래봤자 두 번째, 어머니 면회하러 감) 피치 못하게 불편한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얼굴이라도 보려면 일정 속에서 그런 식으로 짬을 낼 수밖에 없었다. 따로 만날 수 있는 입장이 못 됐다. 남편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들과 동석했다. 그나마 남편과 그들은 이제 구면이 됐다. 그래도 우리가 얘기를 나눌 때는 남편은 다른 테이블에 있기로 약속해 두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식사 후에 계산하러 갔더니 이미 A가 식당 주인에게 결제 카드를 맡겨 둔 상태였다. A는 늘 이랬다.
이번에도 친구 A는 기막힌 카톡을 보내왔다. 내가 대통령도 아니고 진주에 순방 가는 것도 아닌데, 친구 A가 역으로 나오겠다고 했다. 어떻게 저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택시를 부르면 되는데 뭣하러 마중을 나온단 말인가?
차와 시간뿐이라는 내 친구 A에게 나는, '차와 시간이 있는 사람이 위너'라고 답장을 보냈다.
A는 여고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우리 몇몇은 친하게 지냈다. A와도 친했다. 내 친구 A에 대한 얘기를 하려면 여고 1학년 때 짝꿍이었던 N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고 1학년 때 10개 학급이었다. 나의 짝꿍은 미술특기생 N이었다. N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나더러 진주 여고에 진학하라고 설득했던 그 3명 중의 하나였다. 진주여고에서 다시 만난 것도 신기하지만 같은 반이 되고 게다가 짝꿍이 됐다는 것은 드라마 같은 일이었다. 이렇게 기가 막힌 에피소드가 있을까? 이 이야기는 브런치에 자세히 나와 있다.
https://brunch.co.kr/@mrschas/456
자취를 하던 내게 N이 자기 집으로 들어와 입주 과외를 해줄 수 있겠느냐고 제의했다. 그래서 N의 방에서 함께 지내며 N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쳐주기로 했다.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른바 '동급생 과외하기'가 시작됐다.
내 밑의 동생도 진주여고에 진학하기로 했단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친구 A가 내 동생을 자기 집에서 당분간 지내게 했다. 내가 N의 집에 기거하고 있었으니 동생이 온다 해도 함께 지낼 수 없었다. 그 입장을 A가 사려 깊게 캐치했다. 그래서 내 동생은 A의 집에 지내게 됐고 거기서 진주여고 입학시험을 봤다. 그리고 내가 N의 집에서 나와 자취방을 구할 때까지 내 동생은 A의 집에서 기거했다. 내 동생을 기꺼이 품어준 A도 A지만 그 부모님과 형제들이 안면부지한 내 동생을 그 집에서 유숙케 한 것은 두고두고 고마웠다. 그러나 지금까지 A에게나 그 부모님께 제대로 인사도 못했다. 나는 그렇게 '은혜 갚지 못한' 사람으로 살았다.
지난번에도, 이번에도 만남이 끝난 시간에, 우리 부부를 KTX 역까지 라이딩해 준 내 친구 A였다.
그래서 A에게 내가 고맙다고 했더니,
"우리, 친구 아이가?"라고 A가 말했다.
A는 말이 길지 않았다. 딱 그 한마디였다.
내가 미안하다고 하니 '친구'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걸 덮었다.
여고 시절에 K는 참 예뻤다. 예쁘면 다 용서받는다는 말이 있다. 나는 K가 그냥 좋았다. 예쁜 K가 내심 부러웠다. 여고 시절에 알고 지냈다가 그냥 서로 소식도 모른 채 40년 넘는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그 누구를 만나도 반가울 만한 때가 됐다. 때때로 K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여전히 아름답고 예쁠 것 같았다.
세월이 많이 지난 후에 진주에 갈 일이 생겼고 그때서야 A와 우여곡절 끝에 소통이 됐다. 사는 데 급급하여 A와 끈을 놓고 지냈다. A와 해후하게 되었을 때 나는 넌지시 물었다. 혹시 K의 근황을 아는지?
"K와 나는 매일 만나는데... 우리는 같은 합창단 단원이고 알바도 같은 데서 해."
"와아, 그렇구나."
"이번에 K도 너랑 만나려고 함께 갈 거야. 네가 늘 보고 싶었대."
"와우, 잘 됐네. 보고 싶었는데..."
K를 향한 내 마음이 짝사랑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내가 다시 진주에 갔을 때, A와 더불어 K도 동석했다. 우리는 서로가 그리워했던 사이였다. 어머니가 생의 마지막을 진주에서 보내시게 되어 내 친구 A와 K를 재회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내게 선물 같은 것이었다.
A는 한평생 봉사하며 살아온 듯했다. 여고 동문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를 여고 동문 단톡방에 초대해 주었다. 내가 단톡방에 초대되니 2명의 동문이 개인 톡을 보내왔다. 이름은 들어본 적 있으나 지냈던 일들은 기억이 가물거리는 동문들이었다. 반가웠다. 내가 그들을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을지라도 그 동문들은 나를 분명히 기억하는 모양새였다. 사람의 기억이란 때때로 지맘대로다. A덕택에 여고 시절을 떠올리며 감성에 젖었다. 그 감동을 시로 적어 브런치에 발행했다.
https://brunch.co.kr/@mrschas/414
선배 H는 끈끈하게 관계를 이어오는 사이다. 젊은 날, 내가 고향에 주저앉아 있었을 때도 선배가 찾아왔었다. 우리는 가야산 홍류동 계곡에 흘러가던 가을 낙엽을 함께 봤다. 그곳에서 도토리 묵을 먹으며 씁쓸하고 텁텁한 인생 얘기를 나누었다. 그 후로도 간간이 나를 만나러 왔던 선배였다. 그래서 선배는 내 삶의 여정을 거의 다 알 정도였다.
그런데 12년 전에 내 아들이 자전거 사고를 당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슬퍼했고 우리를 위로해 주었다. 그분들의 동행으로 여기까지 잘 왔다. 응원과 격려가 끊이지 않아 우리는 절망 속에만 있지 않을 수 있었다.
그때 선배 H는 한 걸음에 아들이 입원해 있던 포항으로 달려왔다. 그날 봤던 선배의 눈빛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러나 선배는 별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말도 위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선배는 알았던 것 같다. 선배는 두툼한 금일봉을 내게 내밀었다.
"이거 유럽 여행 가려고 준비해 둔 건데, 여행이야, 다음에 가면 되지...ㅇㅇ의 병원비에 보태."
그 은혜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때는 아들 병원비가 한 달에 최소한 500만 원 이상 들었다. 병원생활을 6년 정도 했다. 그래도 우리는 길바닥에 나앉지 않았다. 주위에 선배와 같은 사람들이 참 많았다. 날개만 달지 않았을 뿐이지 천사 같은 사람들이었다. 세상은 참 아름답고 따사로운 곳이라는 것을 아들의 사고 이후에 알게 됐다. 온통 사랑과 위로로 마취되어 슬픔의 농도가 많이 옅어졌다. 웃음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혹시 낙심되다가도 그런 분들의 격려를 떠올리며 힘을 냈다.
아들이 집으로 와서 투병한 지도 6년 째다. 다행히 24시간 활동 보조 지원대상자가 되어 물질적인 지출은 많이 줄었다. 12년의 세월을 긴 하루처럼 보내고 있다. 12년 동안, 날이 새면 눈을 뜨고 밤이면 잠자는 아들은 그런 모습으로 자기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사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은 사랑스러운 여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도 남았을 나이다.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그렇게 우린 진주에서 만났다. 시간을 내기가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소중하고 고마운 선배와 친구들이다. 이런 귀한 사람들을 알고 있다는 것이 뿌듯했다. 그들이 내 친구와 선배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선한 사람들이 뿌려주는 사랑으로 범벅되어 살았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사랑의 빚쟁이다.
이 사랑의 빚을 언제 어떻게 다 갚을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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