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728x90
반응형

어머니

23. 어머니, 꽃구경가요! '어머니'를 만나다 시내버스를 타고 교회에 가던 일요일 아침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한 분과 눈이 마주쳤다. "아침부터 무슨 짐을 그렇게 잔뜩?" 이라고 묻는 듯했다. '내 짐이 아니에요.' 나는 이 짐들과 무관하다고 눈짓을 보냈다. 내 발 옆에, 크고 작은 채소 뭉치 보자기가 보였다. 그 옆에는 의자용 보행기도 있었다. 그때 뒷좌석에 앉아 있던 어르신이, "내가 내릴 때 이거 좀 도와줘요."라고 한다. 돌아보니 짐이 한두 개가 아니다. "아, 네~, 아무 염려 말고 몸만 내리세요. 제가 다 들어서 내려드릴 게요." 나도 놀랬다. 나의 어머니가 늘 짐을 챙겨 들고 다녀서 그런 모양새가 참 싫었던 나였는데... 진심을 다해서 그분을 돕고 싶었다. 이윽고 버스가 정류장에 멎었고 옆에 있는 젊은 여자분은 나보다.. 더보기
(2) 오일장 장돌뱅이 어머니는 농사꾼으로 살다가는 자식들 교육을 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셨다. 또한 자식들에게 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당신의 자식들이 한평생 고생하며 살 것이라 여기셨다. 논에서는 벼농사, 밭에서는 채소를 수확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쌀바가지(지명)' 논 다섯 마지기 '띠뱅이(지명)' 밭 하나, 그리고 한 평 될까 말까 했던 앞산 밑에 있던 정구지(부추) 밭이 전부였다. 그야말로 5남매 입에 풀칠도 근근이 할 판이었다. 어머니가 농사일에서 눈을 돌려 장사를 시작한 것은 내가 아직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라고 지칭함)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나는 '고령장'에 가야 하니 옆집 아제 따라서 학교 댕겨 오거래이." 입학식날 아침에 어머니는 그 한 마디만 남기고 부리나케 고령장으로 향하셨다. 그날은 오일장 중에서 고령장이.. 더보기
(1) 기와집 인간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기억을 어디 쯤 에서 부터 해낼 수 있을까? 내 유년의 끄트머리까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가장 아득한 곳에서 떠오르는 기억은 이것이다. 우리 집의 초가 지붕을 기와로 개량하던 날이었다. 아마도 내가 너댓 살 쯤이었던 것 같다. 가난이 뭔지? 인생이 뭔지? 그런 것에 대해 알지도 못하던 때였다. 기와를 이는 그날은 기분이 왠지 좋았다. 신이 났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와 이는 일을 돕느라고 우리 집에 모여 있었다. 어머니는 부엌의 흙바닥에 밥상을 놓고 한창 점심을 차리고 있었다.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상차림이라 평소보다 반찬 가짓수가 많았던 것 같았다. 학이 그려져 있던 사기 접시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지글지글 전을 부쳤던 어머니의 모습도 기억난다. "정신 없어서 죽겠구만, .. 더보기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