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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울보 떼쟁이었다.
방실방실 웃으며 애교를 부리는 아이는 누구나 귀여워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아들은 울보 떼쟁이었다. 아들은 걸핏하면 칭얼대고 보챘다. 그리고 아들은 겁도 많았다.
"무서워, 무섭단 말이야. 저거 다 치워." 아들은 '무섭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아들은 '스탠드형 옷걸이 행거'를 보면 까무러치듯 무서워했다. 벽에 걸린 그림도 무서워했다. 옷걸이 행거를 무서워하는 아들 때문에 옷을 걸어 두는 대신에 옷으로 행거를 덮었다. 아들이 무섭다며 칭얼거려서 벽에 걸린 모든 그림에 신문지를 붙였다.
"이 길로 안 갈 거야. 무서워."
아들은 길 가다가 갑자기 멈추며 소리를 지르곤 했다. 아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또 있었다. 옷가게에 서 있는 마네킹을 몹시 무서워했다. 아들은 마네킹이 있는 곳이 어디 있는지 다 기억했다. 그래서 마네킹이 있는 곳을 피하려고 굳이 먼 길로 돌아간 적이 많았다. 아들은 왜 그토록 두려움에 떨었을까? 아들은 특정 사물을 볼 때 무서운 형상으로 재해석하여 그의 사야에 담는 것 같았다.
해수욕장에 간 적이 있었는데, 절대로 물속으로 들어오지 않으려 했다.
"엄마, 엄마, 엄마~"
"그냥 들어와, 저기 저 사람들 좀 봐. 다들 무서워하지 않잖아. 여긴 무서운 곳이 아니야."
아들은 계속 엄마만 부르며 바닷물이 겨우 발목까지만 차는 곳인데도 물에 들어가지 못하고 덜덜 떨었다.
유치원 차를 탈 때면 자기 자리가 없다며 울어댔다. 유치원 차가 지나가는 코스대로라면 우리 집이 맨 마지막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들이 유치원 차에 탈 때면 겨우 한 자리 정도 남아 있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아들은 그게 늘 싫다고 칭얼댔다. 아들과 실랑이를 하다가 유치원 차를 그냥 보내고 직접 데려다 주기가 일쑤였다.
"다른 친구들은 좋은 자리 앉아 있잖아. 나만 안 좋은 자리 앉아야 해?"
그런 아들에게 사정을 알아듣게 설명해도 통하지 않았다. 아니면 내가 아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제대로 설명을 못해주는 엄마였을까? 아들은 유치원 생활에 '부적응 아이'였다. 아휴, 그런 아들을 구슬리며 키우기가 참 힘들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들의 받아쓰기 성적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10개 중에 겨우 한 두 개 정도만 동그라미였다. 그래서 예습도 시키고 복습도 했지만 받아쓰기 점수는 바닥이었다. 아들은 아무래도 '부진아'인 듯했다. 우리는 아들이 공부 잘 하기는 글렀다는 생각을 했다.
학교 생활은 그렇다 치더라도 교회에서 하는 성경 암송은 시켜 보고 싶었다. 교회의 교단 차원에서 성경 암송 대회가 매년 열렸다. 그 대회에 참가하다 보면 내성적이고 겁 많은 성격도 좀 나아질 것 같았다. 아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 서는 훈련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았다.
아들은 성경 한 구절을 외우는데 하루 종일 걸렸다. 아들은 일단 집중력이 없었다. 보통 성경 한 장은 수십 구절로 이루어져 있다. 성경 암송 대회는 성경 3-4장 정도를 암송해야 한다. 그래서 아들이 성경 암송 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역부족일 듯했다. 아들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혹독하고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들은 6-7년 정도 계속 그 대회에 참석했다.
해가 더할수록 성경 암송하는 실력이 조금씩 나아졌다. 나중에는 한두 번 읽기만 해도 한 장 전체를 암송하는 게 아닌가? 기적 같았다. 이게 그 유명한 유태인 교육법인가? 그것이 발판이 되어 성경 퀴즈 대회에도 참가했다. 어? 아들이 교단 전국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게 아닌가? 아들은 학교 공부보다는 그런 쪽에 트인 녀석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학업에도 약간씩 진보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꼴찌 수준이었는데 졸업할 즈음에는 우등생으로 바뀌어갔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아들은 조금씩 부진아의 모습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아들이 잘하는 것은 스포츠 쪽이었다.
- 씨름대회를 하면 자기보다 훨씬 큰 친구를 씨름 기술을 사용하여 훌러덩 모래판에 넘겼다.
그래서 담임 선생님이 '꼬마 천하장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럴 때는 자신도 자존감이 좀 생기는 모양이었다. 씨름판에 있었던 얘기를 우리에게 전해주면서 아들은 잔뜩 신이 나는 표정을 지었다.
초등학교 운동회 날이었다. 아들은 학급 대표 '달리기 선수'였다. 출발은 같이 했는데 얼마나 빠른지 함께 달리는 다른 애들과 비교가 됐다. 뒤따라 가는 애들은 한참 뒤에서 죽어라 하며 달리고 있었다. 그래도 저만치 앞서가는 아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아들은 뒤를 한 번씩 돌아다보며 여유 있게 달렸다.
- 아들은 등산을 하면 날아가듯 빠르게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그래서 '계양산의 날다람쥐'라고 아빠가 별명을 붙여주었다.
"등산은 건강에도 좋지만 '호연지기'를 키울 수가 있어."라고 내가 말해주었다.
"그게 뭐예요?"
"앗, 너무 어려운 말이지? '하늘과 땅 사이에 왕성하게 뻗친 기운'이라는 뜻인데 산 정상에서 그런 기운을 받을 수 있다는 거야."
"아하, 그렇구나!"
- 아들은 축구도 잘했다.
"넌 '안정환 축구'를 하네."
"그게 뭔데요?"
"아, 그거 내가 만든 말인데, 축구장에서 그다지 많이 뛰지 않는 듯해도 골을 넣고야 마는 '골잡이'라는 뜻이야."
"아하, 그렇구나."
아들은 그렇게 유년 시절을 보냈다.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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