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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교실 엿보기

충분히 반짝이고 우렁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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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저마다 지닌 재능이 다르다. 장기(長技) 또한 각양각색이다. 그들의 또 다른 모습을 보면 '고양이가 숨겨둔 발톱 같다.' 생각이 든다.

 

 

어느 날, Ji가 결석했다. 조부상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아무리 떠올려도 Ji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한 학기를 보냈고 이어 2학기도 거반 지나가는 시점이었는데... Ji의 얼굴을 단번에 기억해내지 못하여 Ji에게 미안했다.

 

몇 해전, 원어민 교사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한국은 모든 학생의 헤어스타일이 같고 교복을 입고 있으니 누가 누구인지 구분을 하기 어렵다. 얼굴도 비슷하게 생긴 것 같다."라고 했었다.

그때만 해도 여학생의 단발머리 기장이 귀밑 10cm가 넘으면 규정 위반으로 적발하던 때였으니... 그 원어민의 말이 공감됐다. 남학생은 짧은 스포츠형 머리였으니...

 

결석한 Ji를 단번에 기억해내지 못했던 나 자신을 굳이 변명하자면,

 

매년 가르치는 학생이 바뀌고 그들은 고만고만할뿐더러 이름도 거의 비슷했다. 게다가 코로나 시국부터는 마스크를 벗어 젖힌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같은 교복, 같은 덩치, 비슷한 이름, 게다가 얼굴은 가려져 있으니 학생을 정확하게 알아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서연, 시연, 나연, 수연, 경연, 시후, 채원, 예준, 지원, 지현, 송현, 경현, 지아, 현아, 시아, 민석, 희준,  민준, 범준, 민재, 민우, 민서... 이런 이름들이다. 어떤 반에는 같은 이름이 세 쌍이나 있었다. 어떤 이름은 각 반에 한 명씩 있을 정도였다. 가, 나, 다, 순으로 출석 번호가 정해진다. 그러다 보니  같은 번호에 같은 이름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면 10818 김민*, 10918 김민*, 11018 김민*, 11118 김민* 등등...

그래서 교사들은 '착한 김민*', '말썽꾸러기 김민*', '머리 짧은 김민*'이라고 구분하여 부르곤 한다.

결국 몹시 나대거나 무엇을 뛰어나게 잘하면 그런 학생은 쉽게 얼굴을 익히게 되고 이름도 잘 기억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Ji가 내 눈에 들어왔다. Ji의 빈자리를 보고 나니 그의 존재감을 알아차린 셈이다.

Ji는 그 반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성실한 학생이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얌전하여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학생들의 이름을 쉽게 기억해내지 못하는 이유는 과대 학교, 과밀학급이어서 더 그런 듯하다. 나는 되도록이면 학생의 이름을 불러주려고 애쓴다. 수업이 끝난 후에는 그들을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수업시간 동안이라 알콩달콩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고 싶었다. 교탁에 적힌 좌석표를 보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면 된다.

 

한 학급의 제적이 30명이 넘는다. 게다가 여섯 학급이나 수업하러 들어가니 무슨 수로 그들을 다 기억하겠는가? 한 월, 수, 금요일에 있는 자유학기 강좌는 학급당 몇 명씩 헤쳐 모인다. 한 기수당 17시간이지만 정작 만나는 횟수는 8회 정도다. 두 시간 연강이기 때문이다. 얼굴을 익혔다 싶을 때면 다음 기수와 교체된다. 창체 동아리 강좌도 마찬가지로 헤쳐 모인다.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겠는가?

 

 


 

이제 적어도 Ji 확실하게 기억하게 됐다.

 

이번 축제 기간에 전시실에서 Ji의 작품을 발견했다.

Ji 보석 십자수 반이었던 모양이다. Ji가 멋지게 완성한 보석 십자수가 전시되어 있었다. 깨알같이 보석으로 수놓는 학생이란 걸 미처 몰랐다.

 

'아하, Ji가 이런 데 소질이 있었구나!'라고 생각했다. Ji의 숨겨둔 발톱을 교실 밖에서 발견한 셈이다. 그래서 더욱 Ji에 대해 관심이 커져 갔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개설한 '주제 선택', 'Mr. Men 읽기' 강좌를 Ji가 수강하고 있었다.

 

Ji에게 조용히 다가가서 독후 활동지를 눈여겨봤다. 소리 없이 Mr. Men 캐릭터를 그리고 있었다. 익살스럽고 정교하게 작품을 완성해나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비로소 Ji가 보였다.

 

[보석 십자수 by Ji / 완성 중인 Mr. Men 독후 활동 작품 by Ji]

 


 

 

Ji의 학급에 있는 학생들은 대체로 정이 많다. 지난 스승의 날에도 영어 수업시간에 맘껏 축하를 받았다. 그 반에서...

 

칠판에 사랑을 담은 메시지가 가득했다.

어쩌면 Ji가 조용히 자기의 맘을 담은 메시지를 칠판에 적었을지도 모른다. 결코 드러내지 않고 맘을 전하는 Ji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Ji네 학급이 마련해 준 스승의 날 에피소드 적은 브런치 글이다.

 

https://brunch.co.kr/@mrschas/250

 


 

Ji 반에 기억에 남는 학생이 한 명 더 있다. Yang이다.

 

어느 날 그 반에서 수업할 때,

 

"학습지 정리가 완성되지 않은 학생은 노래시킬 거예요."라고 하니,

"선생님, 저 학습지 다 했어요. 그렇지만 노래 부르고 싶어요."라고 Yang이 말했다.

 

평소에 Yang은 필기 속도가 늦고 수업 자료 정리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던 학생이다.

그런데 유독 Yang의 소리가 두드러질 때가 있다. 새로운 단원이 시작되면 워밍업으로 단어 챈트를 부른다. Yang은 묘하게 엇박자로 챈트를 따라 한다. 큰소리로 잘 따라 한다. Yang의 소리가 워낙 크니 다른 친구들은 슬며시 소리를 죽인다. 그래도 Yang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 꾸역꾸역 끝까지 챈트를 한다.

 

"선생님, 오늘부터 8 과를 새로 시작하는 날이네요? 그러면 챈트 하겠네요?"

Yang은 챈트 하는 것이 참 좋은 모양이었다. 뒤뚱거리면서도 넘어지지 않는 오뚝이 같았다. 박자가 틀리는 듯하면서도 끝까지 해내는 Yang의 챈트는 은근 중독성이 있었다. Yang의 숨겨둔 발톱은 바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것이었다.

[챈트 영상]

그날도 Yang 스스로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했다. 벌칙으로 하는 게 아니라 노래를 부르고 싶은 맘이 있었던 모양이다.

점심식사 후 5교시는 졸리는 시간이기도 하여 막간을 이용하여 Yang이 노래하도록 허락했다.

 

"뭘 부를 건데?"

"산타루치아요."

"그걸?"

"아, 그거 음악 가창 시험 때 부르는 거예요." 한 학생이 말했다.

"창공에 빛난 별 물 위에 어리어 바람은 고요히 불어오누나! 그걸 부른다고?"

"네에, Yang이 진짜 잘해요." 다른 학생이 거들었다.

 

'설마, Yang이 그것을 부른다고?'

나는 속으로 기대하지 않았다. 챈트처럼 제 멋에 겨워 부를 것만 같았다.

 


 

Yang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동통한 얼굴, 사시가 약간 있는 눈빛, 그리고 작달막한 키, 그런 Yang이 '창공에 빛난 별'로 시작하는 그 노래를 어떻게 부를지 자못 궁금했다.

 

Yang은 침착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사 하나 틀리지 않고 클라이맥스까지 갔다. 교실이 떠갈 듯한 소리로 Yang은 완창 했다. 놀라웠다. Yang의 소리는 탱글탱글했다.

산타 루치아, 산타 루치아~

 

Yang의 소리는 살같이 바다를 지나는 느낌이었다. 쫙 쫙 쫙~

1열 관람석에서 라이브 공연을 본 기분이었다.

 

https://youtube.com/playlist?list=RD-L37ZCkYtz8&playnext=1&si=HoakpdPhiUuupA0L

       [산타루치아: 아쉽게도 Yang의 노래를 녹음하지는 못함]

 

덧글: 이 글을 마무리하는 오늘 Ji의 MR.Men독후 활동지를 봤다.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짜잔, 드디어 Ji의 작품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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