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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모둠전

두 집 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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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틈나는대로 일상 생활의 다양한 글을 이 카테로리에 탑재할 계획입니다.

두 집 살이

 

짐 들고 다니는 것을 무척 싫어하지만, 오늘도 나는 짐을 챙겨 본가를 빠져 나왔다. 본가에서 챙겨 나온 것은 세탁 망이다. 본가에는 세탁 망이 서너 개 있다. 그런데 세컨하우스에 그 세탁 망이 더 필요하다. 살아보니 그랬다.

이렇듯 본가에서 세컨하우스로, 세컨하우스에서 본가로 짐을 옮기곤 한다. 마치 물건 옮기기 게임을 하는 듯하다. 매일 내 손에 짐이 들려 있다. ‘두 집 살이란 것이 만만치 않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유년 시절이 떠오른다. 내 친구, 숙이는 장터 약국집 딸이었다. 그런데 숙이가 때로 윗마을인 우리 동네에 올라왔다. 숙이네 아버지가 우리 동네에 살던 주야 아버지기도 했다. 그들은 엄마는 다르고 아버지는 같았다. 숙이 아버지는 아내가 둘이었다. 양쪽에서 태어난 자녀를 다 합치면 열 명도 넘었다. 지금 생각하면 두 집 살림했던 숙이 아버지가 대단한 것 같다. 그러나 주야 엄마는 항상 농사일에 찌들어 있었고 숙이 엄마는 장터 약국에서 부채질하며 약국을 운영하고 있었다. 두 여인 모두 남편을 퉁명스럽게 대하며 사랑이 고픈 모습들이었다.

또 아래 담에 살았던 꼬마네 아버지는 네 명의 아내가 있었다. 엄마가 서로 다른 애들은 한데 어우러져 잘 지냈다. 꼬마네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꼬마네 아버지가 다섯 번째 여자와 시내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꼬마 엄마를 비롯하여 네 명의 엄마는 각자도생하며 지냈다. 남편이 생활비 한 푼을 보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다 꼬마네에 놀러 가면 꼬마 엄마는 소주잔을 기울이며 넋두리해댔다.

 

이년의 팔자, 우야믄 좋노? 저 자슥들 불쌍해서 우야믄 좋노?”

 

두 집 살림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유년의 때에는 제대로 몰랐다. 주야 엄마가 농사일이 힘에 부칠 때마다 벌벌 떨며 울던 내막이나 꼬마네 엄마가 훌쩍거리던 속사정을 알지 못했다.

 

나는 팔자에 없는 두 집 살이 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들 때문이다.

아들은 만 12년 전 11월 어느 날 밤에, 대학 캠퍼스에서 셔틀버스를 타러 가던 중이었다. 아들은 자전거로 이동 중이었다. 아무래도 무엇을 떨어뜨려서 급정거했거나 유턴을 시도했던 것 같다. 운동 신경도 좋은 아들이 어떻게 자전거에서 넘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 아들은 자전거에서 떨어지면서 머리를 크게 다쳤다. 그 자리에서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다. 자전거를 보관소에 세워놓은 후에,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화장실에 들러 닦고 119를 불렀다. 병원에 도착해서 아들은 죽을 것만 같은 통증을 호소하며 가까운 친구들에게 연락했다. 정작 같은 대학에 다니고 있던 누나에게는 연락하지 않았다. 누나가 걱정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아들은 의식을 잃고 말았다.

아들은 12년째 인지 없는 세미 코마 상태다. 몇 번의 수술을 했고 포항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포항으로 구급차를 타고 오갔다. 6년 동안 병원 노매드 생활을 했다. 우리의 삶은 아들이 중심이었다. 아들이 맑으면 우리도 맑고 아들이 어두우면 우리도 어두웠다. 우리는 아들에게 동반 의존된 삶을 살아오고 있다.

 

입원 7년 차가 되었을 때 결단해야만 하는 일이 생겼다. 7년 차부터는 의료보험 공단 규정상 재활 운동 급여대상자가 아니었다. 한 달에 최소 500만 원 정도의 지출(간병인 급여가 매월 약 300만 원 정도)을 감수하며 병원에 마냥 있을 수 없었다.

기도 삽관을 한 상태에서 위루관을 통하여 경관 영양제를 투여하는 중증 환자를 집으로 옮겨오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살던 32평 아파트는 재활 병원처럼 변했다. 환자용 침대, 경사 침대, 전동 자전거, 리프트기, 휠체어 등등은 물론이거니와 아들의 병간호 용품으로 온통 가득 찼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니 활동 보조 지원 대상자가 되어 국가로부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아들이 입원해 있었던 6년 동안에는 간병인의 도움을 받았다. 집으로 오면서부터 장애인 활동 지원 사업인 바우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활동 보조사가 아들에게 배치되었다. 바우처 포인트는 점점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활동지원사들이 드나들어 우리의 사생활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우리는 근처 숲세권 투룸 전세를 얻어 나갔다. 그러자 아들이 독거 중증 장애인의 자격이 주어져서 마침내 24시간 활동 보조 지원 대상자가 되었다.

 

투룸 전셋집에 지내보니 모든 것이 불편했다. 그냥 잠만 자는 세컨하우스는 큰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집을 다시 하나 더 장만하여 아들을 내보내고 우리가 본가를 탈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가구 2 주택법 때문에 아파트를 살 수 없었다. 그래서 깔끔한 신축 빌라를 살펴보던 중이었다.

 

? 집이 너무 예쁘고 좋네. 우리가 신혼처럼 이 집에서 지내세.”

 

인터넷 블로그에 나와 있는 신축 빌라 사진을 보던 남편이 말했다.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들을 옮기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살던 전셋집을 빼고 그 신축 빌라로 옮겼다. 본가에서 살림 도구 일부를 옮겨 와서 신혼 아닌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2년 정도 살아보니 슬슬 맘속에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나의 정년 퇴임 6개월 전쯤이었다. 퇴임을 하게 되면 집에서 지낼 시간이 많아질 텐데 뷰도 제대로 즐길 수 없는 빌라에 살다가 인생을 마감하기는 좀 그랬다.

 

,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눈을 못 감을 것 같아.”

 

32평 아파트에 놔두고 온 파우더룸이나 통유리 베란다를 송두리째 사용하지도 못한다는 것이 영 아쉬웠다. 아들이 실상 사용하는 것은 안방과 운동기구를 두는 방 등, 2개 정도가 고작이었다. 나머지는 그냥 아깝게 놀려두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아들을 신축 빌라로 옮겨오는 연구를 해 보았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중증 환자를 옮겨와서 살만한 크기는 아니었다. 그 신축 빌라는 방 3개에 화장실 2개로 살만한 집이었지만 아들의 재활 병동으로 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제대로 된 아파트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미국발 금리 상승으로 주택담보 대출 이자율이 급격히 높아지자 주택시장이 빙하기로 접어들었다. 부동산 시장의 냉각기라 정부에서 주택정책에 과감한 메스를 대고 있었다.

 

2주택자에게 중과되던 취득세가 완화되고 2주택자에게도 은행 담보 대출이 허락된다는 것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주택 시장을 살려보려고 정부는 풍 맞은 주택 시장에 혈전용해제 한 방을 투여했다. 그것이 바로 20221114일부터 시행된 '투기과열지구 조정지역 해제'였다. 이 법은 우리 가정에 훈풍을 몰고 왔다. 그래서 우리는 29평 아파트를 우여곡절 끝에 구입했다.

 

새로 장만한 세컨하우스는 인프라가 아주 좋은 곳이었다. 요즘 화두가 되는 노년에 살기 좋은 집의 조건을 충족하게 갖춘 집이다.

아들은 본가에 있고 우리는 세컨하우스에 살고 있다. 두 집 살이에 이제 이골이 났다. 그래서 생활의 리듬을 탔다. 그렇지만 6년 넘게 두 집 살이를 하고 나니 앞으로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피곤한 두 집 살이를 마무리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마지막 프로젝트를 계획 중이다.

아들을 공공 영구 임대 아파트로 안착시키고, 본가에 있는 묵은 짐을 다 정리하고 그 집을 처분하면 마침내 두 집 살이가 끝이 날 것 같다. 본가에는 우리의 책장이나 큰 살림, 여행용 가방, 앨범, 진열장, 이불 등등 만만치 않은 살림살이가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있다.

 

이 땅의 나그네 삶에서 우리는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느 것도 정석일 수 없다. 형편대로 살아야겠지만 두 집 살이는 만만치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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