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 모둠전

그 화려했던 ‘답’프러포즈!

728x90
반응형

그 화려했던 프러포즈!

 

딸내미가 Y대 치위생학과 3학년 때였다. 갑자기 휴학하겠다며 폭탄선언을 했다. 우리는 딸의 의지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랬지만 딸은 휴학 처리를 끝낸 후에 뉴질랜드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는 법이었다. 뉴질랜드에서 2년을 보낸 딸이 어느덧 귀국했다. 복학하여 학교에 다니는가 싶더니 아예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편입 준비를 하겠다고 했다. 그것도 포항에 있는 한동대학교에 가겠다고 했다. 남동생이 먼저 한동대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편입이 쉬운 게 아니라던데?”

 

그 한마디를 했다가 딸에게 애먼 소리를 들었다. 딸이 진로를 결정하려는데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엄마가 그런 소리를 한다나? 딸은 화를 버럭 냈다. 그러는 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기가 막혔다. 학업 중에 휴학하더니, 어학연수를 떠났다. 그런 것은 우리 세대는 거의 없던 일이었다. 게다가 뜬금없이 전혀 다른 전공으로 편입하겠다고 하니 어안이 벙벙해졌다. 잠시 후면 졸업하여 멋진 치위생사가 되는 것은 떼어 놓은 당상이었는데.

 

평생직장으로 하기에는 자신이 없어요.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요.”

 

딸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내심 미안했다. 그때만 해도 적성을 고려하지 않고 수능 점수에 맞춰 대학을 고르던 시절이었다. 그게 부모로서 실수였다. 딸내미는 그것이 자기의 적성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결국 딸내미는 편입 시험에 합격했다. 치위생학과와 전혀 다른 전산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딸은 뉴질랜드에서 돌아와 강남에 있는 외국인 전용 치과에서 한 달간 치위생사로 알바를 한 적이 있었다. 현장에서 직접 그 일을 해보니 자기의 평생 직업으로 삼을 자신이 없었단다.

결국 아들과 딸이 동시에 한동대학교에 다녔다. 남매는 캠퍼스에서도 자주 만났다. 그러다가 201211월 어느 날, 아들은 자전거 사고를 크게 당했다. 그 사고로 우리 가족 모두의 일상도 멈췄다. 우리보다 딸이 받았을 정신적인 충격이 더 심했을 것이다.

남매는 뉴질랜드에서 함께 지냈고, 한동대학교에서 같이 시간을 보냈으니 딸이 받았을 상실감은 어마했을 것이다. 딸은 학교에 가지 않고 동생의 병실에서 뒹굴뒹굴했다.

 

아들이 입원한 1인실 병실에서 온 가족이 피난민처럼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잘 아는 교수님이 병문안 오셨다. 딸과 아들을 둘 다 아는 교수님이었다.

ㅇㅇ야, ,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얼른 털고 일어나야지. 부모님이 힘드실 텐데 너라도 정신을 차려야지.”

 

그날 이후로, 딸은 일상으로 복귀했다. 딸은 고등학교 때부터 응원단을 했었다. Y대 시절에도 응원단원이었다. 딸은 남동생의 병실을 박차고 나간 후에, 한동대학교 응원단을 창단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동대학교에 응원단이 없었다. 딸은 응원단 동아리를 개설하고 몰려온 응원단원들에게 기초 동작을 가르쳐 주었다. 마침내 한동대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응원단이 창단됐다. 응원단은 다른 사람을 응원하는 것이거늘 이 응원단 창단으로 딸 자신이 스스로 큰 응원을 받는 듯했다. 그것에 맘을 쏟으며 조금씩 회복됐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멍한 채로 병원에서 아들만 돌보며 지냈다. 그러구러 두어 달 후였다. 딸이 응원단 공연이 있으니 우리더러 꼭 보러 오라고 했다.

 

우리가 지금 무엇이 눈에 들어오겠는가? 응원단 공연을 보러 오라고 부르다니.’

 

우리는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그때 딸을 맘껏 응원했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는 오로지 아들에게만 정신을 쏟고 딸의 아픔을 간과하고 있었다. 병상에 누워 있는 아들도 아들이지만 딸의 아픔을 미처 챙기지 못했다.

우리는 마지 못해하며 딸이 창단한 응원단 오프닝 공연을 보러 갔다. 날씨가 쌀쌀했지만, 응원단 열기는 대단했다. 힘든 와중에도 그렇게 일어서는 딸이 기특했다. 딸은 그 후에도 마음의 감기를 앓으며 우울하고 힘든 나날을 보냈다. 우리는 딸을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딸은 전공 공부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고 몇 차례 상담 코스로 치료받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우리 가족은 병상의 아들을 품은 채로 각자의 일상을 회복해 가고 있었다. 딸내미는 힘든 와중에 혼자서 4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2016년 여름이었다. 딸내미가 우리에게 여름휴가를 포항으로 오라고 했다. 우리는 간병인에게 아들을 맡겨두고 포항으로 갔다.

2016 포항국제불빛축제 버스킹 페스티벌 딸내미의 응원단이 부스 하나를 오픈했다. 잠시 시름을 잊고 축제를 즐기며 영일대 해수욕장에서의 공연을 만끽했다. 공연이 한창 무르익을 즈음, 딸내미는 "결혼해줄래?"라는프러포즈를 기획하여 공연했다. 가히 감동이었다.

딸은 포항에서 인생의 반려자를 만났다. 동생의 사고로 인하여 너무 큰 충격을 받고 PTSD로 주저앉을 뻔했던 딸내미였다. 그 아픔도 컸지만 반려자를 만난 기쁨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위가 한동대학교 학부를 마치고 포항공대 식물 생명공학 분야 석·박사 과정에 있을 때였다. 교회 청년부에서 안면이 있었던 두 사람이었다. 딸이 한동대학교 전산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포항을 떠나려 할 즈음에, 지금의 사위에게 프러포즈를 받았다. 그래서 딸이 그 버스킹 페스티벌 무대에서 화려하게 프러포즈를 했다. 현장에 있었던 우리도 감동적인 그 장면을 함께 봤다.

 

프러포즈를 했던 포항국제불빛축제 버스킹 페스티벌 (영상 링크)

 

그 해, 딸 내외는 결혼했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었다. 지금까지 알콩달콩 잘살고 있다. 딸은 IT분야 프론트 앤드 엔지니어 개발자이고 사위는 K대 식물 생명공학 랩실에서포스터 닥터로 연구 중이다. 하마터면 삶의 끈을 놓을 뻔했던 딸은 포항에서 만난 평생의 반려자와 잘 살아가고 있다.

 

[출처: 픽사베이]

 

'좋아요'와  '구독' 부탁 드려요~~ 댓글로 소통해도 좋아요^ ^

 

728x90
반응형

'일상 모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게인!  (6) 2024.12.03
사랑하는 아들에게  (4) 2024.12.01
병상 일지  (4) 2024.11.30
먼발치에서 가까운 맘으로 썼던 글  (6) 2024.11.29
시간제 근무 중입니다만  (8) 2024.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