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일지
날이 밝았다. 남편은 이미 아들에게로 갔나 보다. 베란다 통유리 창으로 무더위가 꺾인 가을 하늘이 성큼 들어선다. 나들이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다. 이제 나는, 언제라도 집을 나설 수 있는 은퇴자다. 그러나 아무 때나 그럴 수가 없는 신세다.
남편의 실내화가 중문 앞에 얌전히 놓여있다. 그는 매일 그렇게 삶의 바다에 뛰어든다. 그의 아침은 견과류, 구운 달걀, 과일, 찐 감자, 누룽지 등이다. 아무튼, 그는 이 동네의 ‘칸트’라 불릴 정도로 일정한 시간에 집을 나선다. 마치 시계추처럼.
올해 초에 정년 퇴임한 나는, 아침 시간에 이제 서두를 필요가 없다. 리모컨을 집어 들며 유유자적하게 하루를 시작한다. 그런 것이 퇴임 이후에 가장 두드러진 행복 포인트다.
아침 식사를 끝냈다. 커피 향을 맡으며 혀끝에 쌉싸름한 맛이 감도는 아메리카노 한잔을 마시려던 참이었다. 남편에게서 카톡이 왔다. 사진 한 장이 전송됐다. 그 순간에, ‘헉’이라며 소리치고 말았다. 식겁했다. 아들이 뭔가를 토한 모양이다. 급박한 상황인 듯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별의별 생각이 다 밀려왔다.
‘이제 끝인가?’ 쿵쾅거리는 맘을 억누르며 남편에게 물었다.
“이게 뭐지?”라고. “난리가 아님.”이라고 답장이 온다. 일이 터진 모양이다.
“큰일 났네.”라고 내가 답장을 보냈다. 그러나 보낸 메시지가 오타투성이다. 손가락이 마구 떨렸다. 무의식적으로 무슨 일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고 사는 게 맞다. PTSD는 알게 모르게 나를 짓누르고 있다.
아들은 12년 전, 대학 3학년 때, 교내에서 자전거 사고를 당하여 지금까지 세미코마다. 6년간 병원 생활을 했다. 7년째부터는 재활 치료급여 부분에 의료보험 혜택이 사라진단다. 그동안 매월, 간병인 비용을 포함하여 500만 원이나 지출했었다. 하릴없이 더 이상 병원 생활을 계속할 이유가 없었다. 선택의 여지 없이, 아들의 병실을 집으로 옮겼다. 그때부터 6년간 재택 돌봄 중이다.
아들은 중증 장애인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고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다. 영특하고 건장했던 아들을 떠올려 본들 죽은 자식 불알 만지는 격이다. 아들은 복지부에서 제공하는 활동 보호 지원 대상자다. 그래서 하루 24시간 내내, 활보샘의 도움을 받고 있다. 그래도 남편과 내가 할 일이 의외로 많다. 남편은 오전, 나는 오후 담당이다. 게다가 남편은 아들의 모든 행정적인 일을 도맡아 한다. 아들의 성년 후견인이다. 남편은 12년 동안 아들의 삶을 대신 살고 있다. 또한 아들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나는 현직 교사였기 때문에 퇴근 후에 아들에게 가곤 했다. 아무튼, 1인 N역의 삶이었다.
일주일 후에 아들의 위루관 교체 시술이 예약되어 있다. 일 년에 한 번, 사설 구급차를 불러 아들을 병원으로 이송한다. 남편이 보낸 사진으로 봐서는 아들에게 위급한 상황이 생긴 듯하다. 당장 그 시술은 불가능해질 판이다.
긴 세월 고생만 하던 아들에게 기어이 무슨 일이 생기려나? 하는 걱정에 하늘이 노랬다. 제삼자는 하기 쉬운 말로, ‘그렇게 고생했으니 환자도 환자지만 부모도 못 할 노릇이니 차라리 이제는 그만.’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다. 박완서 작가님이 소중한 아들을 잃은 아픔을 ‘참척’이라고 했다. 작가님의 글에서, 지인의 집에 갔을 때, 중증 환자인 아들을 뒤척이며 그 어미가 투덜대는 것조차 부러웠다고 했다. 그 마음이 백번 이해된다. 우선 아들이 곁에 있으니 말이다. 사지백체(四肢百體)가 마비되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숨쉬기밖에 없더라도, 길고 긴 시간이었지만, 아들을 돌보는 일을 포기하고 싶거나 귀찮게 여긴 적이 없다. 아들을 볼 때마다 사랑스럽고 짠한 마음뿐이었다. 내 속에 나도 몰랐던 옹달샘 같은 사랑이 솟아나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만감이 교차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려는 순간에, 띠리릭 소리와 함께, “똥”이라고 답장이 왔다. 똥이라는 글자가 그때처럼 반가웠던 적은 없다. 턱 밑에 뭔가를 토해놓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지레짐작했다. 혼자 착각했다. 자초지종을 알리는 말풍선을 먼저 보내고 사진을 보냈더라면 내가 혼비백산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도 그렇지만 응가라는 두 글자로 순화하여 알려줘도 되겠건만 아침부터 똥이라고 보내다니. 남자들은 말을 잘 못한다더니 메시지도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아들이 응가를 해서 그 뒤치다꺼리 때문에 남편과 S샘이 쩔쩔매고 있나 보다. 남편이 사진을 보낸 저의는, 나더러 사태를 좀 수습해달라는 것이었다. “금방 갈게요.”라고 답장을 날린 후에, 단숨에 본가로 향했다. 두 번째 정류장에 내리면 되니 금방 갈 수 있다. 버스 안에서는 맘이 저 먼저 달렸고, 버스에 내려서는 총알 같이 달렸다. 릴레이 선수였던 내가 아니던가.
아들을 돌보는 활보샘은 응가 처리하는 일을 부담스러워한다. 아니, 엄두가 나지 않나 보다. 아들은 175cm에, 75Kg 정도인데 인지가 없으니 실제보다 배나 더 크고 무겁다. 통뼈를 가진 아들에게 강직이 일어나면 당할 자가 없다. 다루기가 쉽지 않다. 누워서 지내는 환자의 응가를 처리해주는 데는 요령이 필수다. 그러잖으면 ‘항우장사’라도 난감할 일이다. 그러나 150cm도 안 되는 나는, 엄마이기도 하지만 요령으로 그 일을 척척 해낸다. 내게는 그게 별로 대수롭지 않다. 병상 일지를 꼼꼼히 기록하여 3일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응가를 하도록 유도해오고 있다. 응가의 상태가 더할 수 없이 좋다. 응가 디데이에 아들을 미리 응가 자세 체위를 해두면 그다지 별일이 아니다. 그렇게 해오고 있으니 활보샘이 응가를 치울 일은 거의 없다.
그러잖아도 응가할 날이라서 오후에 뉘어 줄 참이었다. 아들이 그새를 못 참고 내가 당도하기 몇 시간 전에, 응가를 해버린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들이 응가하는 것을 활보샘이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그 점이 실망이었다. 그쯤에 활보샘이 살짝 졸았던 것 같다. 아들을 리프트기에 태워 휠체어에 옮긴 후에 전동 자전거를 타는 재활 운동을 매일 한 시간씩 해오고 있다. 이 과정에 남편이 꼭 필요하다. 그러기 전에 기저귀를 채우려다가 응가가 범벅된 것을 알게 됐다나.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이다. 낌새를 미리 알았더라면 일이 쉬웠을 텐데.
본가에 도착하니 아들의 침상은 난장판이었다. 응가를 치우는 일에 아마추어인 두 분이 해본다고는 했으나 일이 커져 있었다. 깔개는 여러 장 겹쳐 있고 아들은 어정쩡한 자세였다. 이불에도 응가가 묻어 있고 밑에 깔아두었던 시트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두 사람을 내보내고 사태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일이 클수록 마음은 침착해져야 한다. 총탄이 날아 오는 것도 아니고 폭탄이 터지는 전쟁도 아니다. 마음부터 진정시켰다. 인지 없는 아들이지만, ‘엄마가 와서 다행이에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엄마 죄송해요. 얼른 제가 깨어나서 엄마가 하시는 고생에 보답할게요. 힘드시겠지만 깨끗하게 치워주세요.’라고 하는 듯했다. 그날따라 아들의 눈빛은 더욱 반짝거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엄마’라고 부를 것 같았다. 응가 난리에 놀라서 정신을 차렸으면 하는 생각도 살짝 들었다.
아들을 일단 모로 눕혔다. 일명 ‘응가 체위’라고 한다. 아들의 엉덩이와 사타구니에 묻은 응가는 위생장갑을 끼고 깔끔하게 처리했다. 비누칠한 후에 따뜻한 물로 깨끗하게 닦았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침상이 정리됐다. 32평 정남향 판상형 아파트는 환기에 최적이다. 문이란 문을 다 열어젖히고 편백 수액 스프레이를 황토 타일 벽에 뿜어 준다. 그러면 금방 쾌적한 병실이 된다.
6년간 그렇게 아들을 돌봤더니 요즘은 손목이 시큰거린다. 누구는 테니스를 오래 하면 엘보 증상이 온다고 하지만 나는 아들을 돌보다가 그랬다.
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그렇다고 포기할 일도 못 된다. 우리의 고생은 그렇다 치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어야 할 나이인데, 아들이 병상에서 젊음을 다 보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티슈를 뽑아 눈물 콧물을 한참 닦았다. 밤이 늦었다. 그렇게 울어 본 적이 얼마 만이던가? 그래도 속은 후련해졌다.
밤하늘의 별도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반짝거리고 있었다. 몇 개의 별이 내 아픔을 공감하듯 창을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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