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제 근무 중입니다만
우리 부부는 시간제 근무 중이다. 오전엔 남편, 나는 오후에, 파트를 맡아 근무한다. 우리는 서로 교대 근무 중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제 근무를 지속해 하고 있지만, 급여를 받지 않는다. 그래서 무임 노동이다. 우리 부부가 시간제 근무로 하는 일은 바로 중증 환자인 우리 아들을 돌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12년 전에, 불의의 자전거 사고를 당했다. 그 사고로 아들은 머리를 심하게 다쳤고 의식을 잃었다. 세미 코마 상태로 중증 환자가 되고 말았다. 아들의 병상을 돌본 지 열두 해가 지나가고 있다. 아들은 사고 이후 6년 동안은 입원 생활을 했다. 남편은 날마다 입원해 있는 아들에게 갔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았다. 그가 병원에 도착하면 잠시 간병인을 쉬게 하고 그 시간 동안 남편이 아들을 돌봤다. 그는 아들에게,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거나 아들과 함께 했던 추억을 나누었다. 물론 아들에게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입원 7년 차부터는 재활 운동하는 것에 대해 보험금 급여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2018년 11월에, 병원 생활을 정리하고 아들을 집(본가)으로 옮겼다. 그때부터 남편은 병원으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 아들이 있는 본가로 향했다. 매일 아침, 그는 시계추처럼 정확하게 집을 나선다. 그는 걸어 다니는 시계였다. 매일 정해진 시각에 산책을 나선 '쾨니히스베르크 시계'라 불렸던 ‘칸트’를 방불케 했다.
본가에 도착하여 남편은 아들을 재활 운동시킨다. 리프트 기를 이용하여 아들을 휠체어에 태운 후에 전동 자전거에 안착시킨다. 마치 산악 구조대가 환자를 헬기로 이송하는 장면과 흡사하다. 아들이 전동 자전거를 타고 있는 동안에 활동 보호사가 아들 곁을 지킨다. 그 운동이 끝나면 아들을 다시 침상으로 옮긴다. 아들은 매일 한 시간 정도 전동 자전거를 탄다. 그 덕분에 아들은 근육 손실이 거의 없다. 사고 이전의 몸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물 한 모금 입으로 넘기지 못하고 경관 영양식으로 목숨을 부지해왔다.
변화가 없는 일을 반복하여 계속하는 일은 고역이다. 아들에게 매일 가는 남편을 바라보노라면 ‘시시포스 신화’가 연상된다. '의미 없는 일을 끝없이 무한 반복'하는 일의 고통을 그는 매일 겪고 있다.
남편이 오전 근무를 마치고 세컨하우스에 돌아오면 우리는 점심을 먹는다. 점심 식사 후에 나는 아들이 있는 본가로 향한다. 사실, 아들은 24시간 활동 보조 지원 대상자이기 때문에 활동 보호사들이 돌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 부부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 우리 부부는 역할 분담이 되어 있는 셈이다.
내가 할 일은 아들이 있는 본가에 간호 물품을 제때 갖추어 놓는 일이다. 그리고 응가 수발을 하고, 위루관 수술 부위와 기도 삽관 한 곳에 드레싱을 하고, 양치, 목욕, 그리고 휠체어 태우기 등이다.
재고 조사를 꼼꼼히 하여 간호 물품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병원을 대신하는 본가에는 아들의 간호 물품으로 꽉 차 있다. 차례로 재고 물품이 바닥난다. 어떤 때는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구매해야 한다. 다행히 요즘은 인터넷 구매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물품 갖추기가 어렵지 않다.
아들은 175cm, 75~80kg 정도다. 전신이 마비된 상태의 환자의 응가를 수발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환자를 응가 자세가 되게 한쪽으로 눕히는 일이 쉽지 않다. 땀이 줄줄 흐른다. 한쪽 등판에 각진 대형 베개를 대면 응가 자세가 완료된다. 사실 혼자서 해내기 쉽지 않은 일이다. 병상 일지를 기록하고 있어서 응가 주기를 알 수 있다. 입원해 있었던 6년간은 간병인이 도맡아서 그 일을 했지만, 집에서 돌본 6년간은 내가 그 일을 전담했다. 응가는 삼 일에 한 번 정도 눈다. 세월이 많이 흐르다 보니 슬슬 내 손목이 시큰거린다.
드레싱은 의료행위다. 그래서 활동 보호사들은 법적으로 그 일을 할 수 없다. 포비돈, 드레싱 키트, 멸균 면봉, 멸균거즈, 멸균 장갑, 소독된 삽관 튜브, 과산화수소, 생리 식염수, 메디록스, 종이 테이프 등이 필요하다. 위루관이 시술된 복부를 포비돈으로 소독하고, 삽관 튜브를 교체한 후에 삽관 장착 부위를 식염수를 묻힌 멸균 면봉으로 소독한다. 교체한 삽관 튜브를 과산화수소에 담가두었다가 솔로 씻어 메디록스에 잠시 담근다, 마지막으로 튜브를 식염수로 헹궈 UV 살균 소독기에 넣는다.
응가 수발 못지않게 힘든 일이 양치하는 일이다. 사고 이후 2년간은 양치를 해주지 못했다. 아들의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아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요즘은 어느 정도 입을 벌리긴 하지만 강직이 심하여 입을 벌렸다가도 금방 다물어서 난감할 때가 많다. 우여곡절 끝에 칫솔로 1차 양치를 끝낸다. 그런 후에 석션 칫솔로 이를 닦는다. 석션 칫솔은 입안에 고여 있는 침을 다 흡입해낼 수 있어서 편리하다. 매일 한 번 하는 양치는 스포츠 게임이나 진땀 나는 레슬링 같은 것이다. 칫솔이 물리지 않게 후딱 닦고 재빨리 빼내는 것이 요령이다. 힘든 일이지만 거르지 않고 양치를 했기 때문에 아직 충치가 없다. 이가 상하여 치과에 가야 하는 일만은 피해야 한다.
침상 목욕 또한 힘든 일 중의 하나다. 세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이 일을 하고 있다. 물론 내가 그 침상 목욕을 주도한다. 옷을 벗기는 일이 최대의 난관이다. 그래서 아예 웃옷의 팔 부분을 완전히 터서 단추를 달았다. 한쪽 팔의 옷을 벗기면 다른 쪽은 쉽게 벗길 수 있다. 벗길 때 힘들었으니 입힐 때도 쉽지 않다. 침상 목욕은 침대 위에서 방수 시트 위에 면 시트를 깔고 시키는 목욕이다. 거동이 불가능한 환자를 주로 그렇게 목욕시킨다.
환자를 한쪽으로 돌려 눕힌 후에 그 시트를 등짝에 밀어 넣고 다시 반대편도 같은 방법으로 하여 목욕 시트를 깐다. 그런 후에 아랫도리를 먼저 씻기고, 상체 씻기를 한다. 겨드랑이를 씻을 때는 세 사람이 한데 모여 팔을 들어 올리고 씻는다. 마지막으로 등을 닦는다. 타월 손수건을 여러 장 챙겨 비눗물을 닦아 낸다. 한 사람은 부지런히 온수를 퍼 나르고 다른 두 사람은 양쪽에서 씻긴다. 목욕 후에는 두 개의 세탁기를 동시에 돌려야 할 정도로 세탁물이 한가득하다. 이 분잡한 목욕은 일주일에 한 번 한다. 평소에는 손발만 물로 닦아 준다. 주중에 옷을 한 번 더 갈아입혀 준다. 목욕을 한 번 시키는 일은 주례 행사이지만 무척 힘들다.
매일 오후에는, 휠체어에 아들을 태워 거실로 이동하여 바람쐬기를 한다. 나름 침대를 떠나는 일이다. 리프트기를 이용하여 휠체어에 실었다가 30분정도 후에 다시 침대에 올리는 일도 내 몫이다. 작은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요령을 잘 터득하니 가능하다.
이런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하므로 나는 365일 빠짐없이 아들을 돌보러 본가에 간다. 오후 타임이 내 근무 시간이다.
올해 나는 정년 퇴임했다. 요즘 화두는, 은퇴 생활 시간표를 짜야 하느니, 은퇴 후에 만난 자유를 어떤 식으로 이용해야 하느니, 나이 차별주의를 배격하느니, 신중년이 오고 있다느니 하는 것이다. 이런 물결 속에서 퇴임 이후의 삶에 대해 생각해 봤다.
그런데 나는 이미 중증 환자인 아들을 돌보는 시간제 근무 중이다. 출퇴근만 없어졌을 뿐이지, 생활의 텐션은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다. 나는 무임 시간제 근무자로 말뚝이 박혔다. 그 나머지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찾아야 할 처지다.
사실, 빠듯하게 살면서 백수로 지내나? 좀 더 여유롭게 살기 위해 다른 시간제 근무할 곳을 찾아보나? 라는 갈등이 많다. 이것이 은퇴 후의 나의 고민이다. 앞으로 10년~20년의 내 삶을 어떤 빛깔로 색칠하게 될는지 스스로 궁금하다. 은퇴 후 9개월 남짓 지내보니 지금의 삶이 아주 적당한 것 같다. 집안 살림하며 틈날 때 글 쓰는 취미 생활을 하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지인들과 만난다. 돌아보면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직장 생활을 했는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은퇴 후의 자유를 꿈꾼다. 여행을 다니고, 취미 생활을 즐기며,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나의 현실은 다르다. 나에게는 중증 환자인 아들이 있다. 그의 병간호를 위해 나는 여전히 시간제로 근무하고 있다.
현재 내가 하는 시간제 근무는 나에게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아들의 병구완을 하며 지내면 내 삶은 유연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인 활동을 완전 내려 놓기는 좀 아쉽다. 빠듯하게 살면서 백수로 지내는 것과 좀 더 여유롭게 살기 위해 오전 시간만 할 수 있는 시간제로 근무하는 것 사이에서 고민이 깊다. 주위에 보면 공공기관 등에서 오전 시간만 근무하는 분이 종종 있다. 일종의 공공 근로인 셈이다. 물론 급여는 최저 시급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오전 시간에 근무하러 나간다면 내 삶은 또 동동거리게 될 것 같아 갈등이 된다.
은퇴 후의 삶은 여전히 많은 도전과 고민을 안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희망을 찾고, 나만의 길을 찾아가고자 한다. 시간제 근무를 통해 얻는 작은 자유와 경제적 안정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내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기대해 본다.
일단은 현재의 생활 리듬으로 갈 데까지 가 볼 생각이다. 아들에게 기적이 일어나서 내 삶의 패턴이 확 바뀌든지 재택근무로 할 수 있는 일이 생긴다면 참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현재의 삶을 유지하며 급여 없는 시간제 근무자로 만족하며 살 작정이다.
고령화 시대에 어떤 모습으로 노년을 잘 보낼지 모두가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다. 각자의 삶의 형편에 따라 저마다의 길을 가면 되리라. 나는 아들을 돌보며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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