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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모둠전

어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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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게인!

 

그날 아침, 딸내미와 나누었던 통화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남편이 폰 스피커는 켜지 않았는데도 딸의 목소리가 내게 들렸다. 딱 한 문장을 정확하게 들었다.

 

아빠는 어른이잖아요, 놀라지 마세요.”

그래? ? 그래서? ㅇㅇ이가?”

 

옆 방으로 가서 딸과 통화를 끝낸 후에, 남편이 내게로 다가왔다.

 

ㅇㅇ이가 다쳤다네. 자전거에서 넘어졌다나? 그래서 머리 수술을 했대. 그나저나 우리가 지금 당장 포항으로 가야 한다는데.”

, 그래요? 어쩌죠? 그러면 가야죠.”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201211월이었다. 딸과 아들, 남매는 포항시 북구 흥해읍에 있는 한동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딸에게 전화를 받은 날은 수능 시험을 치는 날이었다. 내가 근무했던 학교는 수능 감독을 나간 교사가 여러 명이라 임시 휴교였다. 교사였던 나는 급히 연가 신청을 내고 남편과 함께 포항으로 향했다.

아들이 자전거에서 넘어졌단다. 하필 머리를 다쳤다고 했다. 그리 심각하지는 않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한낱 자전거에 넘어졌으니 별일은 아닐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머리를 다쳤다고 하니 내심 걱정이 됐다.

우리 부부는 항공권을 급히 구하여 김포공항으로 갔다. 때아닌 여행길에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비행기 속에서 아빠는 어른이잖아요? 라고 했던 딸의 말이 계속 귓전에 맴돌았다.

그랬다. 그 말은, 어른은 웬만한 일에 요동하지 않을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대처해낼 수 있다는 뉘앙스였다. 그러나 큰일이 닥치면 어른도 충격을 받는다.

 

아들은 포항 선린 병원에서 급하게 수술한 후 중환자실에 입원 중이었다. 병원 복도 양편으로 학우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많은 학생이 복도 양편에 길게 서 있어서 우리는 마치 사열식 장을 지나는 기분이었다. 아들은 TV 드라마에서나 봤던 모습으로 중증 환자가 되어 침대에 누워있었다. 전날 저녁까지만 해도 단톡방에서 미주알고주알 대화를 나눴던 아들이었다.

담당 의사가 남편에게 뭐라고 하니 남편의 얼굴이 하얘지더니 울기 시작했다. 심각한 상황이란 걸 감지했다. 아들은 멋을 내겠다고 그 며칠 전에 했던 파마머리를 삭발한 채 붕대로 칭칭 감고 있었다. 마치 미라 같았다. 당연히 의식은 없었다. 오른쪽 눈은 역청탄 빛깔이었다. 눈두덩이는 심하게 부어 있었다. 그걸 보니 다리에 힘이 확 풀렸다. 맘을 다잡으려고 정신을 차렸다.

나는 엄마다! 나는 엄마다!’ 스스로 주문 외듯 중얼거렸다. 남편의 눈에서는 주르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정신 차리자. 그래 정신을 차려야 한다. 나는 어른이고 엄마잖아.’ 그러나 커다란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들은 세데이션이라는 수면 유도 상태에서 인공호흡기를 끼고 있었다. 동공이 확대되어 사망 직전 상태까지 갔다고 했다. ‘사람이 살다가 이런 일도 겪을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니 내 몸이 저절로 떨렸다. 어른이지만 그 상황이 두려웠다. 아들은 생과 사의 경계에 가 있었다.

그날로부터 우리의 모든 시간은 멈추고 말았다. 일상도 멈췄다. 우리는 오로지 아들 곁에만 있었다. 입원 당일부터 아들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맘을 가지고 병문안 오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연고도 없는 곳, 우리로서는 평생 처음 가본 포항이다. 포항에 있던 많은 분이 사랑의 마취제처럼 우리를 감쌌다. 캄캄한 절망 속에 있던 우리에게 불빛으로 다가왔다.

응급 수술을 한 후 3일 차에 아들은 열이 나기 시작했다. 수술 예후가 별로였다. 서울 대형 병원으로 이송해야 한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아들을 그냥 그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촌각을 다투는 순간이었다. 구급차에 아들을 싣고 의료진도 함께 탑승한 채, 우리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로 갔다. 그곳에서 한 달 동안 뇌신경외과 치료를 끝낸 후에 다시 두개골 봉합 수술을 하기 위하여 포항으로 되돌아 가야 했다.

 

포항으로 돌아가는 날, 아들의 혈압이 너무 높아서 곧바로 출발하지 못했다. 그냥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혈압 강하제가 효력이 없었다. 구급차 기사도 아들이 안정되기를 기다렸다. 어찌어찌하여 구급차가 포항을 향해 사이렌을 울리며 달렸다. 그런데 구급차 안 모니터를 보니 아들의 혈압이나 산소포화도가 안정적이었다. 우리가 서울에서 포항으로 출발한다는 소식을 들은 J(한동대학교 교수 사모)이 동역자들과 함께 아들의 바이탈이 안정되도록 기도했더랬다. 그때 중보 기도의 힘을 몸소 체험했다. 포항에 도착해 보니, J(처음으로 만남)이 병원에서 구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J님이 입원 용품을 갖추라며 봉투를 내미셨다. 그날부터 J님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병원에 오셨다. 매일 한 끼 식사를 챙겨주셨다. 그렇게 우리의 포항살이가 시작됐다.

 

병간호하려면 일단 식사해야 합니다.”

 

J님은 매일 배달 음식을 챙겨주셨다. 간간이 병원 근처에 있는 백화점 푸드 코트에서 맛있는 음식을 사주기도 하셨다. 명절에는 자신 댁에서 준비한 음식을 들고 오셨다. 어느 날 병원비를 중간 정산하려고 수납창구에 갔더니 누군가 대납해둔 적도 있었다. 꿈같은 일이었다.

두개골 봉합 수술을 한 후에 아들은 당분간 중환자실에 있었다. 아들의 뇌압이 차올라 션트 수술도 해야만 했다. 그런 수술 후에는 환자가 중환자실에 있게 되어 입원실이 없어진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실로아 라는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했다. 제공자가 누구인지는 12년이 흐른 지금도 모른다. 그냥 그 집 대문 앞 우체통에 있는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됐다. 그 안에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었다. 실내는 큰 평수 아파트 정도였다. 마당에는 강아지도 있었다. 중환자실에 있는 아들을 면회하는 시간이면 우리는 실로아를 잠시 나갔다. 그 사이에 실로아 주인은 우렁각시같이 그곳에 들러 우리가 먹어 치운 반찬을 리필해 두셨다. 냉장고에는 다양한 장아찌가 가득했다. 그때 우리는 매콤한 고추장아찌를 즐겨 먹었다. 세계 각국에서 공수해 온 다양한 차도 준비되어 있었다. 우린 지옥 같았던 그즈음에 실로아에서 천국을 체험했다.

그러다가 병원 근처에 원룸을 얻어 부부가 교대로 쉬기로 했다. 당연히 내가 근무하던 학교에는 휴직했다. 점점 몸이 지쳐 야간에만 간병인을 썼다. 잠을 자야 버틸 것 같았다. 그 야간 간병인은 때때로 각양 재료를 듬뿍 넣은 된장국을 지져오셨다.

 

병원에 오래 있다 보면 집에서 지진 된장국이 그리운 법이에요.”

 

우리는 간병인이 지져온 된장국으로 잃었던 입맛을 되찾곤 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포항은 참 정다운 곳이네.”라고 했다.

 

우리는 힘든 와중에도 포항에서 받은 사랑으로 견뎌내고 있었다. 앞만 보고 달리다가 어느 날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선린 병원뒷골목의 어느 담장 너머에 진달래와 개나리가 활짝 피어 있었다.

 

, 봄이네.”

 

봄이 왔다는 것도 모르고 우리는 아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포항을 떠나 서울로 돌아오기로 맘먹었다.

 

아직 젊은데 이렇게 요양병원에만 있지 말고 재활치료를 본격적으로 받아요.”

 

15년간 세브란스 백병동에서 치료받다가 고향인 포항 요양병원으로 내려온 환자가 있었다. 그 환자의 보호자가 모든 걸 체념하고 요양병원에서 하염없이 지내고 있는 우리를 타박했다. 우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1년 계약이었던 원룸의 주인이 우리 사정을 알고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증금을 빼주셨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포항에서 사랑을 받은 일들을 다 기록한다면 그 책으로 포항 시내를 덮고도 남을 정도다. 포항을 떠나오던 전날에도 누군가 찰밥과 나물을 준비하여 병원에 오셨다. 포항에는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 물심양면으로 돕는 자들이 참 많은 곳이었다.

잠시 복직 서류를 떼러 포항에 내려갔을 때,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분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요양병원 옆 침상의 보호자였다. 그런 온정이 숨을 쉴 수 있게 했다.

 

 

아들은 12년째 계속해서 한동대학교 휴학생으로 처리되고 있다. 아들이 한동대학교에 다시 복학한다면 전 세계에 다 들리도록 기쁨의 환호성을 지를 테다. 해방을 맞아 고국의 고향으로 돌아가 기쁨으로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들과 같은 심정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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